이론과 실제의 괴리, 하지만 반드시 가져야 할 양립요소
양의 군집본능의 또 다른 측면에서 대해서 더 얘기해보고자 한다.
보통 학교라는 공간은 이 세상을 축소화하여 추상적인 관점에서 교육을 하는 곳이다. 복잡다단한 현실의 층위를 걷어내고, 오직 핵심적인 원리와 규칙만을 추출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한다. 칠판 위에 적히는 숫자는 그 자체로 완결된 세계이며, 공식에 따라 예외나 돌발 변수가 끼어들 틈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교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정제된 논리는 거친 현실의 파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다. 여기저기에서 돌발변수와 예외적인 상황들이 인하여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선생님은 빌리 밥에게 묻는다. "네가 12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한 마리가 담을 뛰어넘었다면, 몇 마리의 양이 남아 있을까?" 교실의 문법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11이라는 숫자를 떠올릴 것이다. 12에서 1을 빼는 행위는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 올린 수학적 질서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리 밥의 대답은 단호하다. "한 마리도 없어요." 선생님은 혀를 차며 빌리 밥이 뺄셈의 원리조차 모른다고 타박하지만, 빌리 밥은 오히려 담담하게 대꾸한다. 자신은 뺄셈은 모를지언정 자신의 양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이다. 이 짧은 대화는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깊은 인식론적 균열을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론의 정합성'과 '현장의 실체'가 어떻게 서로의 평행선을 달리는지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지식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이 대변하는 지식은 이성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세계처럼, 현실의 양이 어떻게 움직이든 숫자 12와 1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여야 한다. 하지만 빌리 밥이 서 있는 곳은 철저한 경험주의의 토양이다. 그에게 양은 숫자로 치환되는 단위가 아니라, 털끝 하나하나의 감촉과 무리 지어 움직이는 본능을 가진 생명체다. 양은 우두머리가 움직이면 나머지 개체들이 맹목적으로 그 뒤를 따르는 강력한 군집 본능을 지니고 있다. 농부인 빌리 밥에게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었다는 것은 이미 나머지 열한 마리도 그 뒤를 쫓아 허공으로 몸을 날렸음을 의미한다.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선생님은 전두엽 피질을 사용하여 느리고 신중한 '시스템 2'의 분석적 사고를 수행하고 있다. 반면 빌리 밥은 기저핵과 변연계에 각인된 패턴 인식, 즉 빠르고 직관적인 '시스템 1'의 사고를 가동한다. 빌리 밥의 뇌는 수만 번의 관찰을 통해 양의 행동 패턴을 하드와이어링(Hard-wiring, 자동으로 수행되는 상태)했고, 이는 논리적 계산을 거치지 않고도 정답에 도달하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세상을 재단하려 든다. 이를 인지심리학에서는 '심적 모델(Mental Model)'의 충돌(사고와 실제의 충돌)이라고 부른다. 선생님의 심적 모델은 모든 변수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선형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12마리 중 한 마리가 사라지는 사건은 나머지 11마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독립 시행인 것이다. 그러나 빌리 밥의 심적 모델은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시스템적 사고에 기반한다. 한 마리의 이탈은 전체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하는 트리거가 된다. 거드 기거렌저가 말한 '생태적 합리성(Ecological Rationality)'의 관점에서 보자면, 빌리 밥의 대답은 오히려 선생님의 대답보다 월등히 합리적이다. 실제 농장에서 11마리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주인은 모든 양을 잃게 되겠지만, 0마리가 남았을 것이라 직감하고 달려 나가는 주인은 양들을 다시 불러 모을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틀렸을지언정, 생존의 차원에서는 빌리 밥의 답이 곧 진리인 셈이다.
이러한 지식의 괴리는 현대 사회의 곳곳에서 반복된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인공지능(AI)의 부상은 이 문제를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생성형 AI는 수조 개의 데이터를 학습하여 가장 확률적으로 높은 답을 내놓는다. 어떤 의미에서 AI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선생님'이다. AI에게 12에서 1을 빼라고 하면 소수점 아래까지 정확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AI가 빌리 밥처럼 '양의 털끝'까지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데이터는 과거의 기록일 뿐이며, 그 기록 너머에 있는 생생한 맥락과 개별성을 포착하는 데 한계가 있다. 앞선 글을 통해서, 비노드 코슬라는 2030년 경이되면 인간의 노동이 더 이상 가치를 창출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그가 간과한 지점이 바로 빌리 밥의 '현장성'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수치화되는 시대일수록, 시스템이 놓치고 있는 미세한 균열을 감각하는 인간의 직관은 더욱 귀해질 수밖에 없다. 추상적인 데이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장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야말로 기계가 모방하기 어려운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주식 시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풍경은 매일 같이 펼쳐진다. 수많은 투자자가 차트와 지표를 분석하며 이른바 '라운드 피겨(Round Figure)'나 '이평선' 같은 추상적인 숫자에 매몰된다. 기술적 분석은 과거의 데이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려는 선생님의 뺄셈과 닮아 있다. 하지만 시장은 때로 단 한 마리의 양(주도주 혹은 대외 변수)이 울타리를 넘는 순간, 논리적인 지지선을 무너뜨리고 집단적인 광기에 휩싸여 폭락하거나 폭등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차트 위 숫자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라는 '양의 습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스윙 분할 매수 전략을 세우는 투자자가 단순히 가격의 낙폭만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공포와 탐욕이 어떤 궤적으로 흐르는지를 통찰하려 노력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바닥이어야 마땅하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바닥 아래에 지하실이 있다는 것을 아는 빌리 밥의 감각이 때로는 전 세계 수재들이 모인 헤지펀드의 알고리즘보다 정확할 때가 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선생님의 논리와 빌리 밥의 경험은 결코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숙련자는 뺄셈의 원리를 알면서도 양의 습성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이론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되어주지만, 발밑의 진흙탕을 헤쳐 나가는 것은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의 근육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그 지식이 실제와 충돌할 때 발생하는 마찰력을 견디며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교과서 속의 양을 세는 데 급급해 실제 우리 곁을 지나는 양들의 거친 숨소리와 불안한 눈빛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털끝까지 잘 안다"는 빌리 밥의 말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대상과 혼연일체가 된 몰입의 경지를 의미한다. 자신이 다루는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찰이 전제되지 않은 지식은 결국 공허한 숫자의 나열에 불과하다.
우리는 흔히 '안다'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한다. 시험 문제의 정답을 맞히면 안다고 생각하고, 보고서의 수치를 채우면 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앎에는 층위가 있다. 표면적인 데이터를 읽어내는 앎이 있는가 하면, 대상의 본질적 속성과 상호작용하는 앎이 있다. 전자가 누구나 대체 가능한 지식이라면, 후자는 오직 그 시간과 공간을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혜다. 빌리 밥의 대답이 주는 진정한 시사점은, 자신의 영역에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때로 보편적이라고 믿어왔던 논리를 배반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다수가 '11'이라고 외칠 때, 자신의 관찰과 경험에 근거하여 '0'이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은 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뺄셈은 우리 문명을 지탱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다리를 지을 수도, 로켓을 쏘아 올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리 밥의 통찰이 없다면 그 다리는 강물의 흐름을 무시한 채 무너져 내릴 것이고, 로켓은 대기의 변수를 읽지 못해 폭발하고 말 것이다. 두 세계의 결합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성의 완성형이다. 지식은 현실이라는 거울에 비칠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니며, 경험은 이론이라는 틀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 당신의 일상과 일터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양'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며 좋을 것이다.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빌리 밥의 단단한 직관을 얻는 그날까지, 관찰과 사색은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