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점수화
가끔 소셜을 통해서 이런 일화, 저런 일화를 소개한 글들이 올라온다. 그중에서도 종업원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글이나 영상을 쉽게 접하곤 한다. 어떤 남녀는 서로에게 꿀이 떨어지는 듯한 광경이다. 그러나, 한 종업원의 실수로 인해서 상황은 역전하게 되는 경우다. 그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고, 그들 중 한 명이 서비스 종사자를 향해 날카롭고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내는가 하면, 그 상황을 정리하는 내내 불편한 시선과 욕이 날아든다. 이 짧고도 극적인 장면은 내 머릿속에는 서서히 근원적인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호의를 베풀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한정된 관계 속에서만 감동하고 마음을 연다. 과연 '그들끼리만' 좋은 사람이 과연 진짜 좋은 사람일까.
이 의문을 논리적으로 풀어가기 위해, 구글의 알고리즘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좋겠다. 구글은 본질적으로 세상의 수많은 정보 중에서 '무엇이 더 가치 있고 중요한가'를 끊임없이 묻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내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후반, 초창기 구글이 세상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페이지랭크(PageRank)라는 검색 기술 덕분이었다. 페이지랭크는 특정 웹페이지의 가치를, 다른 신뢰할 수 있는 수많은 문서들이 그 페이지를 얼마나 가리키고 있는지를 통해 평가한다. 이는 고유벡터 계산의 무한한 반복을 통해 네트워크 전체를 관통하는 전역적(Global)인 권위와 보편적인 연결성을 정량화하는 알고리즘이다. 반면, 현재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대형 언어 모델(LLM)의 심장부에는 어텐션(Attention)이라는 메커니즘이 자리하고 있다. 어텐션은 전체 웹을 보지 않는다. 그 대신 특정한 문장, 즉 주어진 맥락 안에서 방금 입력된 단어가 바로 옆에 있는 다른 단어들과 얼마나 연관성이 높은지, 그 문맥적이고 국소적인(Local) 중요도를 계산한다. 이 수학적 평가 방식의 진화를 인간관계에 대입해 보면, 카페에서 본 남자의 태도가 명확하게 설명된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은, 자신을 향한 '어텐션 점수'가 기형적으로 높은 사람이다.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이 특정한 상황과 맥락 안에서, 자신의 모든 심리적 가중치와 자원을 자신에게 집중한다. 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 것 같은 엄청난 심리적 만족감과 특별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무례하다는 것은 '페이지랭크'가 철저히 붕괴되어 있는 사람이다. 사회라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불특정 다수와의 사이에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보편적인 연결망을 전혀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전역적인 연결 없이 자기들끼리만 폐쇄적으로 순환하는 웹페이지는 결국 검색 엔진에 의해 스팸이나 질 낮은 사이트로 분류되고 만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선함이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존중에 뿌리를 두지 않고 오직 특정 대상에게만 선택적으로 집중된다면, 그 선함은 매우 조건적이고 취약하며, 심지어는 자기중심적인 소유욕의 변형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기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생태 시스템에서도 흔히 관찰된다. 자연의 공생 관계를 떠올려 보자. 표면적으로 말미잘과 흰동가리의 관계는 대단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보인다. 그들은 오직 서로에게만 은신처를 제공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한다. 흰동가리는 말미잘에게만 좋은 생물이고, 말미잘 역시 흰동가리에게만 너그러운 환경이다. 하지만 진정한 생태계의 건강함은 이 고립된 짝짓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말미잘과 흰동가리는 거대한 산호초 생태계라는 네트워크의 일부다. 만약 이들이 오직 자신들만의 안위를 위해 주변 환경을 오염시키고 다른 생물과의 상호작용을 차단한다면, 결국 산호초 전체가 백화현상으로 죽어갈 것이고 그들의 배타적인 도피처 역시 무너지고 만다. 인간 사회에서 배타적인 관계에만 기대는 것은 죽어가는 산호초 위에서 우리 둘만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과 같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정언 명령을 역설했다. 보편화될 수 없는 친절, 즉 대상이 연인에서 종업원으로 바뀌는 순간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리는 친절은 이 보편의 법칙에 위배된다. 그것은 선함으로 위장한 전략적 효용일 뿐이다.
우리가 나에게만 좋은 사람을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때, 대단히 위험한 자기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자신이 상대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거나, 혹은 자신의 존재가 너무도 특별해서 상대방의 숨겨진 따뜻함을 끌어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인간 행동의 벡터(Vector)는 철저한 관성의 법칙을 따른다. 편향된 데이터로만 학습되어 보편적인 문법을 결여한 인공지능 모델이, 예상치 못한 프롬프트(Prompt)가 입력되었을 때 결국 환각(Hallucination) 상태에 빠지거나 공격적인 텍스트를 출력해 내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인성의 근본적인 '페이지랭크'가 망가진 사람 역시 맥락이 바뀌면 반드시 자신의 진짜 영점(Baseline)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연애 초기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사라지거나, 의견 충돌로 인해 내가 더 이상 그의 집중적인 '어텐션' 대상이 아니게 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때 종업원을 향해 휘둘러졌던 그 날카로운 칼날의 방향은 필연적으로 나에게만 좋은 사람한테 향하게 된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폭력성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자신이 특별한 지위를 잃었을 때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예고편이다. 우스갯소리로, 결혼 전과 후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TV 미디어나 실생활, 또는 건너 듣는 일화를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누군가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기준을 전면적으로 재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좋은 사람은 관계의 밀도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네트워크 상의 모든 노드(Node)를 향해 0이 아닌 단단한 '페이지랭크'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예의와 존중이라는 탄탄한 지반이 마련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위에 사랑하는 이를 향한 깊고 농밀한 '어텐션'을 안전하고 아름답게 쌓아 올릴 수 있다. 식당의 종업원, 길을 묻는 낯선 이, 그리고 배달원에게 기본적인 존중을 표할 줄 아는 사람은 건강한 인성의 행렬(Matrix)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이가 당신에게 베푸는 다정함은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조건부 전략이 아니라, 그가 가진 안정적인 내면세계가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흘러넘친 결과물일 것이다.
우리는 혹시 스스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에게 배타적인 선함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내가 지금 그 국소적인 다정함의 수혜자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향한 그의 보편적인 무례함을 애써 눈감아 주고 있지는 않은가. 타인에 대한 배제를 자양분 삼아 자라나는 관계는 결국 그 자체의 모순적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질지도 모른다.
진정한 특별함이란 누군가에 대한 잔인함을 밟고 서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과정에서 자신만 예외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과 타인을 향한 보편적 배려심이 그 특별함을 진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누구에게 어텐션을 집중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의 인성이 가진 페이지랭크는 과연 몇 점일까. 이는 타인을 평가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거대한 인간관계의 연결망 속에서 나 자신의 좌표를 잃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