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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영 Jan 08. 2024

영(煐)

영, 당신은 저의 주문이었어요.


기억하죠, 오래전 그날은 눈이 내렸고

그보다 더 오래전의 그 날에는 제 세계를 침범하고도

사과하지 않는 오만한 당신이 있었지요.


깨진 접시를 치우는 것보다

쓸모있는 일을 냉큼 말하기가 어려웠고

그 탓에 당신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파고들어

섭렵하고 싶어지지 않았겠어요.


그런 내가 원하기 이전에도

당신은 이 세상에 있어주어

저는 그게 감격스러웠습니다.


당신에게 고백하고 문득 부끄러워 뒤돌아 달렸을 때

내리던 눈을 부리던 게 당신이었나요?


당신이 앞에 없는데도

저는 여전히 당신을 볼 수 있다는 걸

그 순간에도 말해주고 싶었더랬죠.

저 골목부터 이 골목 끝까지 당신에게 휘어있다고요.


이제껏 올곧은 애정을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던

당신의 눈빛이 더 곧은 직선이었던 걸 기억합니다.

누군가 당신 눈꺼풀 안쪽에

도료 따위를 발라 두었을지 모르는 일이죠.


모든 걸 제 시선에서 보고 싶다고

허리를 구붓하게 둘 때면 보이던

허공의 비눗방울 같은 건 다 뭐였을까요?


영, 알고 있죠?

저는 얼굴보다는 뒷모습

뒤통수의 모양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거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당신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당신 뒷모습이 저를 가깝게 찾아오던 예감과

가장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무용하다면

무용한대로 두어도 좋겠죠.


악착스럽게 맞닿아 있는 형용사며 부사를 몽땅 지웁시다.

그런 것 없이도 누군가 면죄부를 줄 테니까요.


영아, 당신은 알고 있죠?

내가 자꾸 널 영이라 칭하는 이유는

넌 여기서도 저기서도 영(煐)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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