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를 읽고, 이용마 기자님께
"이 책을 사랑하는 아내 김수영, 쌍둥이 아들 이현재 이경재에게 바칩니다."
이용마 기자님께
책 속표지를 넘기면 당신의 목소리인양 헌사가 울리죠. 이 땅에서의 마지막 힘을 다 불살라 쓰신 책을 부인과 쌍둥이 두 아들에게 바친다는 고백입니다. 2019년 8월 21일, 만 50세에 떠나신 당신의 3주기가 며칠전 지났습니다. 마침 이런 시기에 당신의 책을 읽고 글을 쓰자니, 헌사에 자꾸만 눈이 갑니다.
복막 중피종이라는, 현대 의학이 사실상 포기한 병으로 12~16개월이라는 시한부를 선고받은 당신은 책을 쓰기로 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남은 힘을 다해, 두 아들이 성인이 됐을 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셨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2012년 3월 MBC노조 홍보국장 당신은 170일간의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첫 해고자가 됐죠. 당신은 복막암을 얻었고 5년만에 복직을 하는 기쁨도 잠시, 당신은 2019년 8월 2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질병은 사회적인가 개인적인가?"
이용마 기자님!
사심 가득한 맘으로 당신의 책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를 읽었어요. 영화 <공범자들>을 보고 나니 딱 당신 한 사람이 제 맘에 남았거든요. 많고 많은 인물들 중에 왜 당신이었을까요? 노조활동하다 해고되고 병까지 얻은 당신에게 끌리는 걸 어쩌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말했다죠. "얼마나 속이 썩었으면 화병이 났겠냐"고요. 최승호PD한테 집요하게 질문받으셨다죠. 왜 굳이 노조를 했느냐고, 노조한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요. 당신은 다른 삶을 살아보지 못해서 모르겠다고 답하셨죠. 다른 삶을 상상한 적도 없었을 테니까요.
"노조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삶이 나았을까? 노조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가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더 힘들어하지는 않았을까?....." 당신은 책에서 그때를 회상하며 길게 반문을 하더군요.
네, 맞아요 이용마 기자님! 인생에서 가정이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신의 삶을 암과 죽음을 지우고 생각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하냔 말입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제게 질문을 하고 있어요.
질병이란 무엇일까요?
질병은 사회적인 일인가 개인적인 일인가?
걸어온 것과 다른 길을 택했다면 과연 내 삶은 더 행복했을까?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죠.
아, 제가 암환자라는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당신이 복막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은 2016년, 저는 간암 수술 2년이 되어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었어요. 당신의 건강회복을 뜨겁게 응원하며 지켜보고 싶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마음아픕니다. 처음 간암수술할 당시만 해도 질병은 그저 제 개인의 불행인 줄만 알았어요. 내가 내 몸을 함부로 하고 잘 돌보지 못한 걸 많이 후회했죠. 가족력 있는 B형간염보유자니 간암진단을 피할 길이 없었다고 본 거죠.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나, 질병은 제게 끝없는 질문이었어요. 새로운 통찰이고 세계였고요.
당신의 책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가 그래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당신의 삶은 결코 당신 만의 것이 아닌 걸 보여주었어요. 당신의 질병은 결코 개인적인 이야기만일 수 없군요. 질병 뒤에는 우리 사회구조와 어두움이 고스란히 연결돼 보였어요. 질병은 결단코 사회적인 눈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당신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달라져야 한다는 당신의 꿈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기득권 엘리트가 아니라 대중의 집합적인 힘에 있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이 한 모든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이용마 기자님!
질병은 사회적인 문제로 읽어야 함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의 책에서 우리 현대사를 잘 정래해 주신 게 좋았어요. 개인의 문제와 사회문제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잖아요. 잊을 수 없는 대목이 있었어요. 프란체스코 교황님이 방한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겼죠. 당시 방한한 교황이 세월호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교황이 노란 리본 다는 것도 말렸죠. 중립적이지 않다는 논리로 말입니다. 그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교황님은 세월호 가족들을 만나셨죠. 물론 노란 리본을 달고요.
"인간적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206쪽)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세월호 참사를 개인의 불행한 사고로 치부해야 했을까요? 인간적 고통 앞에, 한때는 저도 '중립'이 있는 줄 알았어요.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면 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더랬죠. 알고 보니 힘 가진 사람들이 만든 속임수더군요. 도대체 사회적 참사 앞에, 고통받는 사람들 앞에, 자동차 기어처럼 중립이란 입장이 가능하긴 한 걸까요?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가 무자르듯 나눠지기나 하던가요? 사회적인 참사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든가, 고통을 외면하든가, 두 가지뿐이더군요.
인간적 고통 앞에 필요한 건 중립이 아니라, 편들기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게 아픈 몸으로도 당신이 죽는 순간까지 이 세상에 대해 하고 싶었던 일이었던 거죠?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맞아요. 이용마 기자님, 당신의 글을 읽는 내내 저는 참 부끄럽습니다. 20대 30대 젊은 날 저는 이 세상을 무지와 무관심으로 방관하며 살았으니까요. 막연히 알고 있는 것 이상 공부하려는 개인적인 노력이 없었어요. 보수적인 세상이 가르쳐주는대로, 주입된 대로, 그냥 살았거든요. 그러니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냈어요. 바꾸려면 너무 거슬러야 할 게 많고 불편을 감수해야 할 게 많았으니까요.
삶은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게 나를 배신할 때가 오거든요. 내가 믿었던 것들이 나를 배신하기도 하거든요. 결국 고통이 우리를 흔들어 깨우기도 하죠. 내가 믿던 것과 너무 다른 세상의 실체가 한순간 드러나기도 하죠. 내 몸에 질병이 나를 뒤흔들기도 하죠. 그런 순간이 오면,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이 바꾸고 싶었던 세상에 대한 꿈, 잊지 않겠습니다. 제게 주어지는 책임을 피하려하지 않을게요.
이용마 기자님, 당신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당신이 남겨준 글, 그 정신, 그 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요절한 주유를 당신은 말년에 떠올리셨다죠. 주유가 다시 살아나 자신의 꿈을 성취하는 모습을 생사의 갈림길에도 그려보았다죠. 그래서 책 마지막 장을 덮기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주유들이 꿈을 이루고 세상을 바꾸며 사는 세상을 저도 함께 꿈꾸겠습니다.
저도 세상을 바꾸는 길을 뚜벅뚜벅 가겠습니다. 그럼요!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꿈꾸지 않는 사람에겐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꿈꾸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바꿀 수 있는 곳이고 말고요. 감사합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엘리트는 과연 누가 개혁해야 하는가. 이들을 바꾸지 않으면 개혁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혀명보다 개혁이 훨씬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폐쇄적인 엘리트를 뛰어넘으려면 대중의 집합적인 지혜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상식에 입각한 대중의 의견이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3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