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 눈사람, 한나절

불쑥 찾아온 친구와의 한나절, 사람은 사람이 따뜻하게 녹이는거로구나

by 꿀벌 김화숙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어떤 아침엔 운동을 충동적으로 하죠. 맨날 똑같으면 재미없으니까요. 오랜만에 딸 출근길 동행해서 걷기 말입니다. 모녀 같이 걸어갔다가 저 혼자 돌아왔어요. 올겨울 네 번째 시도였답니다. 영하 18도였을 때 걸은 기억 때문일까요? 오늘 아침 정도는 상쾌하고 포근하기까지 하더군요. 더구나 같은 시간대 같은 장소에서 해를 보니 계절의 변화가 확연했어요. 어둑어둑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해가 하늘 위로 둥실 올라와 있더군요. 집에서 나설 때부터 사방이 훨씬 환하게 밝았고요.


딸과 헤어져 혼자 걸어 돌아오는데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우리 동네 쪽으로 아침 운동 나가니 얼굴 좀 보자고요. 연락은 하고 지냈지만 코로나 때문에 얼굴 못 본 진 1년이 돼 가는 친구거든요. 두 시간 가까이 걸은 터라 온몸이 훈훈해서 그런가요? 집에서 하다 말고 나온 일 따위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밖에 나와 걷는 중에 친구가 보자는데 못 할 게 없잖아요. 어떤 하루는 이렇게 흘러갈 수 있다니까요?


"응응 반갑다. 잘 됐네. 나 본오 1동까지 걸어갔다가 지금 사동 넘어오는 길인데, 10분 남짓이면 만날 거야."





우리 동네란 한양대학교 정문 앞이랍니다. 거기 누군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이 있더군요. 키 크고 잘 생긴 눈사람인데 옆으로 많이 기울고 있었어요.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인사를 하는지 말을 거는지. 이제 곧 사라질 거라고 아쉬워하는 모습인지. 하여간 우리를 붙들어 세우더군요. 중년의 우리가 눈사람 만들고 놀 일 있겠어요? 그렇다고 손자 놀아주는 때도 아니고 말이죠. 눈사람을 만든 기억도 가까이 본 기억도 모두 가물가물하더군요. 아직 10시 전 아침이었어요. 아침 해가 눈사람 뒤로 비쳐 올라오는 게 보였어요. 더 포근해지면 기울어진 눈사람은 더 녹아 사라지고 말겠더군요. 우리 또래 친구를 만난 양 눈사람하고 같이 놀았지 뭡니까. 같이 사진 찍고 말도 걸고, 수다를 떨었죠. 앞으로도 보고 옆으로 보고, 안아 주기도 하고요. 어떤 아침은 이렇게 흘러가기도 한다니까요? 내일 아침에 꼭 다시 가 봐야겠어요. 눈사람이 사라지고 없으면 섭섭할 거 같아요.





어떤 한나절은 전혀 계획에 없는 그림으로 완성되기도 한다니까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면 그런 신기한 일이 많이 일어나니까요. 아침에 집에서 나갈 땐 딸 바래주고 부지런히 걸어 돌아오려니 했죠. 그런데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죠. 눈사람을 만났죠. 놀며 동네를 걸었겠죠. 평소 저는 자연식 하네 건강식 하네 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이 겨울에 2주 단식까지 한 후라 늘 자연식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친구랑 커피 마시고는 브런치도 먹었답니다. 계란말이 김밥에 프렌치 노스트. 세상에 어쩌면 채소 하나 없이 한 끼를 먹고 살기도 하나 봐요 사람이? 친구가 즐겨 찾는 곳이라니 분위기 느껴볼 겸 고민하지 않고 함께 했죠 뭐. 가격이 5,000원 안 되니 그나마 착한 편이라 해야겠죠? 친구는 수다 중에 저와 함께 책 모임도 하고 싶다네요? 어떤 한나절은 그렇게 흐른다니까요.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으니 시간이 많긴 많나 봐. 내가 전에 안 하던 걸 하게 되더라고. 가르치는 건 코로나 때문에 다 접었어. 오래 해 오던 애들 토요일에만 하고 있어. 내가 요리하는 거 진짜 재미없었거든? 그런데 예쁘게 음식 하고 플레이팅도 했어. 친구 따라서 해 보니 재미있더라. 화분 가꾸는 것도 전에는 무슨 재미로 하나 했는데, 요즘은 너무 이쁜 거야. 틈나면 꽃에 물 주고 화분 사 와서 돌보게 돼. 그리고 내가 생각했어. 언니처럼 책 모임에 나가 볼까 하고 말이야. 해 오던 것만 하지 말고 새로운 걸 시도해 볼 때다 싶었어. 책을 읽고 싶어지더라?...."




이른 아침 나갔다가 4시간 지나서 집에 돌아왔어요. 걷고 땀 흘리고 다시 식었으니 손발이 차가워져 있었죠. 따뜻한 물에 샤워부터 했습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며 눈사람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눈사람 자살 사건>이란 시를 생각했고요.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눈사람이 따뜻한 물에 녹으며 사라지는 것처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살이란 무거운 단어에 비해 따뜻한 물에 녹아 사라진다니 참 느낌이 오묘하죠. 온수에 몸이 따뜻해질수록 눈사람마저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뭐죠? 따뜻해진 몸으로 상큼하고 싱싱한 사과를 씹어 먹었어요. 생과일이나 채소가 빠진 끼니였으니 그렇게 아쉬움을 달랜 거죠. 따뜻해진 몸이라서 그럴까요? 춥게 살아온 눈사람을 녹여주는 따뜻한 물이 이 세상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사람은 결국 사람이 따뜻하게 녹이는 거로구나. 불쑥 찾아온 친구와 계획 없던 한나절을 보내고 오니 그런 생각이 들었지 말입니다. 새 책벗을 얻으니 마음이 더 따뜻해지고 있었거든요.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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