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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

관점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by 부자백수

무예(武藝)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대의 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피하는 것은 하수(下手),
상대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피하는 것은 중수(中手),
상대의 숨소리와 무게중심의 이동을 보고 공격을 예측하는 것이 바로 고수(高手)입니다.
고수와 하수, 중수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관점’입니다.


이따금 이 글을 읽으며 무릎을 칩니다. 비단 칼을 쓰는 무인들의 이야기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 업무와 관계, 그리고 성장의 과정에 이 비유는 놀랍도록 정확하게 들어맞습니다. 어떤 분야든 남들보다 한 수 위를 내다보는 사람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고수’라 부릅니다. 그들은 우리와 무엇이 다른 걸까요?

저는 그 차이가 ‘관점의 해상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얼마나 더 깊고 입체적으로 현상을 파악하는가의 차이입니다.


가령 이런 경험, 한번쯤 있으실 겁니다. 신입사원 시절, 저는 부장님이 보낸 한 줄짜리 까칠한 메일에 온종일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나를 싫어하시는 걸까?’ 눈앞에 닥친 ‘칼날(부장님의 질책)’에 모든 정신이 팔려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았죠. 전형적인 하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 비슷한 상황을 마주한 선배는 달랐습니다. 그는 부장님의 메일을 보고 덤덤하게 말했습니다. “아, 오전에 임원 회의에서 된통 깨지셨나 보네. 이따 커피 한 잔 타 드려야겠다.” 그는 칼날이 아닌 ‘어깨의 움직임(임원 회의라는 원인)’을 본 것입니다. 중수의 경지였죠.


그렇다면 고수는 어떨까요? 아마 그는 부장님의 메일을 받기 전부터 상황의 전체적인 맥락을 읽고 있었을 겁니다. ‘요즘 회사 전체 실적이 안 좋고, 우리 팀이 맡은 프로젝트가 핵심인데, 어제 다른 팀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왔으니 오늘 아침 임원 회의 분위기는 분명 험악했을 것이다. 곧 우리에게 압박이 들어오겠구나.’ 그는 상대의 숨소리와 무게중심, 즉 보이지 않는 전체의 흐름을 읽고 다음 수를 예측합니다. 현상을 3차원으로 해석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런 관점의 차이는 타고나는 재능일까요? 저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사람들을 관찰하며 내린 잠정적 결론은 이것입니다. 관점은 재능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설계’된 결과물입니다.


고수와 초보의 가장 큰 차이는 경험을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초보는 그저 사건을 통째로 기억할 뿐입니다. 부장님에게 혼났던 ‘아픈 기억’으로만 남습니다. 하지만 고수는 경험을 겪는 순간마다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폴더를 정리합니다. ‘이런 상황(패턴)에서는, 이런 이유(원인) 때문에, 이런 결과(맥락)가 나타나는구나.’


이것은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초보는 눈앞의 현상을 해석하는 데 모든 인지적 자원을 소모합니다. 반면 고수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기본기를 ‘체화’시켜 놓았습니다. 덕분에 아낀 에너지의 대부분을 현상 너머의 맥락과 의도를 파악하는 데 사용합니다. 처음부터 “뭘 봐야 하는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현상보다 원칙, 의도, 리듬 같은 ‘비가시적 요소’를 먼저 봅니다.


이 설계의 핵심은 바로 ‘경험의 연결’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 ‘Connecting the Dots’와 정확히 같은 원리입니다.

지식은 점(Dot)입니다.
책이나 강의를 통해 얻은 파편적인 정보들이죠.
경험은 그 점들을 이어주는 선(Line)입니다.

처음에는 점과 선이 따로 놉니다. 머릿속은 온갖 정보와 몇 번의 경험으로 산만하고 분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맥락의 경험이 일정 임계점(Threshold)을 넘어서면,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흩어져 있던 선들이 서로 교차하며 의미 있는 ‘면’, 즉 패턴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험의 절대적인 양이 아닙니다. 서로 관련 없는 100개의 경험보다, 비슷한 맥락에서 반복된 10개의 경험이 훨씬 더 강력한 패턴을 만듭니다. 저는 이것을 ‘경험의 곱집합’이라 부릅니다. 경험들이 서로의 의미를 강화하고 증폭시키며 단단한 구조를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죠.


이 패턴이 충분히 쌓여 구조화되면, 마침내 뇌 안에 세상의 작동 방식을 시뮬레이션하는 ‘내부 모델(Internal Model)’이 생겨납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사건을 사후적으로 해석하는 대신, 사전적으로 예측하게 됩니다. 뇌가 현재의 미미한 신호 속에서 미래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뇌를 어떻게 길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생존의 뇌(편도체)에 지배당할 것인가, 아니면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분석하는 사령관의 뇌(전전두엽)를 활성화할 것인가. 그 선택은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 좌절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왜 실패했지? 어떤 신호를 놓쳤을까?”라고 복기하는 작은 습관. 그 의도적인 회고의 과정이 뇌의 회로를 바꾸고, 경험의 점들을 연결하며, 자신만의 단단한 관점을 설계해 나갑니다.


어쩌면 성장이란, 세상에 대한 나의 이해도가 높아지는 과정일지 모릅니다. 떠다니던 지식과 경험이 비로소 연결되며 하나의 논리적 흐름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복잡했던 세상이 훨씬 더 명료하게 다가오는 경험. 이것이 바로 뇌가 스스로의 해상도를 높여가는 방식입니다.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는 어떤 점들이 떠다니고 있나요? 그 점들을 연결하기 위해, 당신은 어떤 경험의 선을 그어 나가고 계신가요?


세상은 변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깊이는, 분명 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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