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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Sep 09. 2022

런던, '버킹엄궁'에서 생긴 일.

영국 여왕은 세계인에게 어떤 존재인가? 

오늘 아침, 영국 여왕의 서거 소식을 듣고 10년 전 6살 아들을 데리고 떠났던 유럽 가족 배낭여행의 추억을 떠올려 봤다. 


런던 여행 3일째던가 영국 여왕이 산다는 버킹엄궁을 가기로 했다. 그 앞에서 벌어지는 근위병 교체식은 유명한 관광상품이지 않은가.

오전 11시에 시작한다고 해서 여유 있게 조금 일찍 가자 했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을 해버렸다. 지도만 보고 거리를 측정했고 길을 잃을 우려도 계산했는데 실제 우리의 숙소와 여왕의 숙소는 너무도 가까왔던 것이었다. 걸어서 10분쯤. 아.. 우리가 한동네에서 같이 머물고 있다는 이 동질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미 광장에 나와 있어서 놀랐다. 나야 실수로 일찍 왔다 치고 세상 곳곳에서 온 이 사람들은 무슨 수퍼스타라도 보겠다는 듯이 이렇게 목을 빼고 기다리니.. 이번 영국 여행에서 느낀 건, 여왕은 아직도 건재한 세계적인 수퍼스타이며 로얄 패밀리는 엄청난 권력과 인기로  만인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광장 주변도 돌아보고 궁 언저리도 한 바퀴 돌고 사진도 찍고 분수대 구석에 앉아 싸들고 온 간식도 먹다 보니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그 사이 군중은 더 불어나서 옴짝달싹 할 수도 없을 만큼 주변이 꽉 찼다. 본격적인 교체식이 시작되기 전 근위병 일부가 먼저 행진을 잠깐 하는데 도대체 사람이 너무 많아 볼 수가 없었다. 궁전 앞 정문은 물론이고 광장과 분수대 모두 사람으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니 궁전 정문에서 동쪽으로 난 거리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그곳이 측면이고 거리가 좀 멀긴 해도 차라리 구경하기는 낫겠다 싶어 그쪽으로 이동했다. 아직 본격적인 교체식은 시작도 안 했다.

경찰들이 돌아다니며 '소매치기가 많으니 가방을 앞으로 메라.'고 일일이 주의를 주었고 말을 탄 경찰들은 군중들을 정리하느라 점점 바빠졌다.



특히 저 경찰은 약간의 쇼맨십이 있는 듯해서 '니들은 저 쪽으로 걸어라.' '이 선을 넘지 마라'며 매우 큰 목소리와 동작으로 소리쳤는데 사람들이 놀라 돌아보면 장난이라는 듯 싱긋 웃었다. 여왕 행렬을 예비하는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는 둥 재미난 분위기였다.

이제 막 식은 시작되어 군악대가 풍악을 울리고 제복을 갖춰 입은 멋진 근위병들이 말을 타고 착착 행진을 하는데 갑자기 내 앞에서 큰 소동이 일었다. 아까 그 경찰이 누군가에게 멈추라고 고함을 지르더니.. 세상에!! 그 사람 많은 데서 그 말을 타고 10 미터쯤 전속력으로 달렸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앞을 황급히 가로막으며 급정거를 하는 것이었다.

아스팔트 위에 부딪치는 소란스러운 말발굽 소리며 히힝 대는 말의 우렁차고 가쁜 호흡. 모든 시선은 교체식에서 벗어나 이들에게 쏠렸다.

말은 원래 잘 달리는 동물이라 백 미터든 천 미터든 얼마든지 달리겠지만 겨우 10미터 남짓한 짧은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앞다리를 확 접으며 기수가 명한 지점에서 급정거한다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경찰의 스펙터클한 말 조련술에 우선 깜짝 놀랐고, 도대체 뭔 일인가 봤더니 웬 행색이 초라한 어떤 남자가 그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이어 주변의 몇몇 경찰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그 남자를 에워싸고 팔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우고는 한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무슨 테러범이라도 잡은 건가? 한구석에서 경찰의 심문은 이어지고...

누군가는 소매치기를 하다 잡힌 것 같다 하는데 왠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쫓기는 그 남자를 얼핏 봤을 때 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는데 아무리 프로페셔널하다 해도 경찰에게 쫓기는 소매치기가 누군가와 전화를 하며 도망가지는 않지 않나. 내가 볼 때 그는 그냥 정신이 좀 맑지 않은 노숙자 정도였다. 근위병들은 이제 궁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교체식을 하나 본데 너무 멀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내 정신은 분산돼 딴 일만 눈에 들어왔다.


어찌 됐든 교체식 구경을 마치고 하이드 파크 쪽으로 걸어 나오는데, 아까 그 남자가 아직도 거리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주변인들의 얘기를 듣자 하니 그의 죄는 '멈추라 했는데 멈추지 않은 죄' 란다.

그 소리를 듣고 잠시 놀랐다. 그 죄가 그리도 큰 거였나..


그러나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했다. 공권력의 사소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누군가가 결국은 사회 전체를 크게 흔드는 위험한 일을 벌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에 여왕을 호위하는 이들은 호들갑 혹은 과잉에 가깝도록 이런 이들을 잡아내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단지 제복 입고 폼 잡으며 쇼만 하는 게 아니고 여왕의 안전과 사회 안정을 위해 철저하게 훈련하며 긴장 속에 일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실감 나게 보았다는 얘기다.

내가 쇼를 보자고 이날 이곳에 서 있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코 앞에서 이런 생쇼까지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고 이 궁 안에 사는 여인이 어떤 권위를 지닌 존재인지는 확실히 인지하고 체험했다.^^(2013/11/01 씀)


호주는 영연방 국가이다 보니 여왕과 로열패밀리에 대한 애정과 충성도가 다른 나라보다 큰 듯하다. 자손들은 여러 스캔들로 가족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국민의 원성을 사기도 하지만 여왕은 한평생 지혜와 절제로 왕위를 유지하며 존경을 받아 왔다. 최고의 위치에 있음에도 휴가때면 남편이 해주는 바베큐를 먹고 같이 차를 만들어 마시며 설겆이도 직접하는 등 평범한 일상을 즐겼다는 소탈한 여인이다. 미디어를 통해 그녀의 미담을 많이 듣고 주변인들이 그녀를 얼마나 애정 하는지를 들어와서인지 나도 왠지 옆집의 멋진 할머니를 잃은 듯한 아쉬움을 조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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