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소도시를 한나절 거닐며...
그렇게 며칠간 크루즈 안에 머물며 항해를 하다가 드디어 4일째 되는 날 찰머스항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 눈을 떠 선실 창문을 내다보니 작은 항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뉴질랜드 땅을 밟는구나! 든든히 아침을 먹고 간단한 수속을 거쳐 배 밖으로 나오니 단출하고 아담한 크루즈 터미널이 있었고 지역 여행사와 가이드들이 길 안내도 하고 당일 투어 상품도 팔았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사소한 질문에도 열심으로 답을 해주었다.
투어는 크루즈 안에서도 예약할 수 있지만 가격이 비싸며 당일 현장에서 로컬 여행사와 하는 것을 권장하고 싶다. 터미널 안에 책상 하나 임시로 놓고 엉성하게 영업하지만 믿을 만한 여행사들이 크루즈에서 파는 것과동일한 다양한 상품을 판매한다. 뉴질랜드가 처음인 우리는 그냥 소도시를 하루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듯해 바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항구에서 도심으로 가는 셔틀 버스비를 크루즈 안에서 30불에 팔았는데, 터미널에서 길 하나 건너 탄 대중교통 버스비는 2-3불에 불과했다. 일반 버스도 크루즈에서 내린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10여분 달려 도착한 던이든 시내는 아담하고 조용했다. 크루즈가 내려주지 않았다면 굳이 찾아올까 싶을 만큼 평범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래서인지 마음이 더 평화로워졌고 큰 기대를 내려놓고 걷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작은 것들에 더 마음이 가는 곳이었다.
가령 한국을 처음 오는 외국인들이 서울이나 부산등 대도시나 대표 관광지를 벗어나 속초나 목포 같은 작은 항구 마을에서 한나절을 보내는 기분이랄까...
200여 년 전 유럽의 탐험가들이 처음으로 이 땅을 발견하고 이주민들이 배를 통해 유입이 되어서인지 항구를 주변으로 형성되고 발전한 마을들은 유럽의 여느 도시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아름다운 교회들과 기차역 박물관 건물들은 세월을 버티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도심을 안내하는 작은 지도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크게 펼쳐볼 일도 없었다. 그냥 되는 대로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고 걸었다. 길 잃은 고양이가 쫓아오면 '넌 누구냐?' 이러면서 쉬엄쉬엄 시간을 거닐었다.
마을의 중심엔 스코틀랜드인의 자부심 로버트 번 시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시인의 조카가 이 동네 장로교회의 첫 목사님이었다는 사실을 교회 박물관에서 발견하고 그들의 족보와 업적을 연관 지어가며 역사를 나름 상상했었다. 근데 여행을 다녀온 뒤 이 이야기를 다니던 교회의 뉴질랜드 출신 할머니께 했더니 대뜸 '그 교회 그 초대 목사님이 내 고조할아버지야' 이러시는 거다. 그 교회홀의 구석을 잘 찾아보면 자기 이름도 새겨져 있다며 족보를 읊으신다. 재미난 세상이다. 지나간 시간은 과거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바닥이든 구석이든 무엇이 되어 현재로 이어진다. 좋든 싫든, 청산을 하든 내세우든, 끊어내기 어려우니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 과거이고 역사인가 보다.
그렇게 걷다가 들어간 동네 미술관에선 뜬금없이 어느 수집가가 기부했다는 모네의 그림도 발견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원주민들이 이주자들이 전파한 질병들로 인해 죽어갔다는 역사도 같이 적어놓았다.
전시장 가득 누워 잠자는 토끼풍선은 뭔가.. 어쨌거나 귀엽고 우습다.
그렇게 만보 이상을 족히 걸으며 마을을 대략 모두 둘러보니 배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내 집인 양 설렁설렁 들어가니 저녁 시간이라며 또 한 상 차려준다. 즐겁고 감사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