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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윤 Sep 13. 2022

'수리남'과 야구 사인공, 박찬호 100승 이야기

수리남에서 박찬호 사인볼은 진짜였을까?

넷플릭스 영화 수리남은 6부작으로 구성되어 상영 시간이 긴 작품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단숨에 보았다고 말할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했다. 특히 1부 첫 장면과 6부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 야구공이 등장하기에 야구공에서 시작해 야구공으로 끝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약왕이 야구를 좋아하는 설정이어서 실제 메이저리그 경기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어, 캐치볼 하는 모습도 여러 장면에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 푸에르토리코가 '국가'로 출전한 것이 상대를 설득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등 야구를 소재로 한 부분이 꽤 등장한다. 직업 관계상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대목이어서 수리남에 나온 야구와 스포츠 부분을 영화와 상관없이 스포츠로만 풀이하고자 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선 국정원 요원 최창호는 주인공 강인구에게 이렇게 말하다. "전유환 만나고 왔는데, 강인구 씨에게 말 좀 전해달라 하더라고요, 자기가 꼭 돌려받을 게 있다고, 무슨 야구 사인볼이라고 하던데?" 이 말을 들은 강인구가 "아 짝퉁 사인볼?"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국정원 요원은 "아끼던 거라고,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유일하게 진짜라고"라고 배경을 설명한다. 이에 강인구가 "이게 진짜라고?" 말하면서 사인공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공은 마약 거래를 하기로 한 날 전유 환이 박찬호의 100승 기념 사인볼이라며  파이팅하는 의미로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런데 콜롬비아 마약 업자와의 거래를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박지성의 사인공을 건네는 장면을 보면 실제 박지성의 사인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박찬호의 100승 기념공 역시 가짜일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인데, 영화 마지막 장면만 놓고 보면 진짜 박찬호의 100승 사인공인 것처럼 나온다.


박지성의 사인을 마약왕의 부하가 하는 장면은 현실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모습이다. 실제 2002년 월드컵 당시 직접 히딩크의 사인을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통해서 사인 공이나 유니폼을 선물 받았다면 아쉽지만 히딩크의 사인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높다. 당시 밀려오는 사인 요청에 대비해 국가대표 코칭스태프 가운데 히딩크 사인을 담당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국내 프로야구 역시 사인공을 부탁하면 대부분 홍보팀 관계자 가운데 한 명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인을 워낙 많이 하다 보니 한 구단 홍보팀 직원은 선수 사인을 정말로 똑같이 하게 되었고, 실제 선수 역시 본인의 사인과 홍보팀의 사인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사인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모 구단 홍보팀 관계자는 자동차 트렁크에 유명 선수 사인공을 2-3박스씩 갖고 있다가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사용한 적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영화만 놓고 보면 박찬호의 100승 사인이 진짜인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박찬호 100승 기념 사인공일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야구에서 가장 의미 있는 공은 홈런공이다. 실제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공을 잡기 위해 잠자리채까지 동원할 정도로 홈런공 경쟁은 치열했다. 홈런공은 하나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마지막 공 역시 중요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에서 쿠바의 병살타로 금메달이 확정되자, 1루수 이승엽은 잠시 환호한 뒤, 공을 주머니에 넣었다. 올림픽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의 야구공이라는 가치를 알기 때문이었다. 반면 선발 투수의 공은 완투를 하지 않는 한 의미가 조금 떨어진다.  박찬호는 2005년 캔자스 시티를 상대로 5이닝 동안 11안타 6 실점한 뒤 마운드를 내려왔는데, 팀이 14대 9로 이기면서 통산 100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홈런공이나 경기를 마무리한 공과는 달리, 선발 투수의 어떤 공을 기념구로 하기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박찬호의 100승은 텍사스 홈이나 LA-뉴욕 같은 대도시가 아닌 캔자스시티에서 열렸다. 영화에 나오는 마약왕이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지는 캔자스 시티까지 가서 박찬호에게 '직접' 사인공을 받았을 확률은 높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부하 중 누군가가, 개인적으로는 변호사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박찬호의 100승 기념 공이라며 전해주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것을 실제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약왕은 열혈 야구팬이지만 축구는 좋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 푸에르토리코가 출전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야구팬임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푸에르토리코는 WBC에서 우리나라와 한 번도 대결한 적이 없어, 한국 야구팬의 입장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2013년과 2017년 모두 푸에르코리코가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영화의 WBC 배경은 2009년 무렵으로 나오며 2013년과 2017년에는 한국 야구가 모두 1라운드에서 탈락했기에 WBC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령 푸에르토리코가 WBC에 국가로 출전하는 것을 아는 사람보다는, 월드컵 축구에 영국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북아일랜드로 출전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월드컵에 개별 출전한다고 해서 독립국이라고 볼 수 없는 것처럼 WBC 출전과 국가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박찬호가 100승을 거둘 때 상대 투수는 1999년 21승을 거둔 호세 리마였다. 리마가 21승을 거둔 경기의 상대 투수는 LA 다저스 시절 박찬호였다. 박찬호를 상대로 최다승을 올렸던 리마가 박찬호 100승 상대가 된 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다. 그 호세 리마는 이후 기아 타이거즈에서 활약해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하다.  호세 리마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동료였던 양현종은 데뷔 첫 완봉승의 영광을 리마에게 바치며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도미니카 출신인 호세 리마는 1999년 21승을 비롯해 메이저리그 통산 89승을 올린 선수이다. 같은 도미니카 출신인 오티즈는 메이저리그 홈런 더비 우승을 리마에게 바치기도 했다. 영화 '수리남'은 실제 '수리남'이 아닌 호세 리마의 모국인 '도미니카'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번 영화를 통해 야구팬들은 박찬호의 100승뿐 아니라 KBO 리그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호세 리마의 추억까지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잊혀 가는 것을 추억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영화의 매력이다. 스포츠와 관련된 영화는 스포츠 팬들에겐 큰 축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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