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자의 마음책방 #2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안녕하세요?”를 풀어보면 “아무 탈 없이 편안하세요?” 라는 의미인데요. 코로나19의 위기 대응 단계가 심각으로 격상되고 전국적으로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마당에 요즘만큼 “안녕하세요” 란 인사가 무색할 때가 없는 것 같아요. 여러 모로 참 뒤숭숭한 시기이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마음의 안녕을 바랍니다.
오늘은 코로나의 추이를 지켜보며 떠오른 소설 하나를 여러분께 소개하려 해요. 바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인데요. 어쩌다 보니 마음책방에서 연속 카뮈의 책이네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기는 합니다만^^;) 페스트는 프랑스 인근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페스트와 이에 대응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평범한 일상이 전염병으로 인해 어떻게 피폐해져 가는지, 갑작스러운 재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얼마나 제 각각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지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상황과 비슷하지 않나요?
소설 속 주인공들은 페스트를 어떻게 경험하고 극복해나갔을까요? 이들의 서사를 따라가며 우리도 코로나 사태를 슬기롭게 보낼 지혜를 얻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난데없는 위기 속에 살아남으려면 필요한 건 마스크만이 아닐 테니까요!
여러분들, 손 잘 씻고 마스크 잘 쓰고 계시지요? 마스크 구하기 정말 힘들지만 ㅠㅠ 어쨌든 이런 위생수칙은 매우 중요해요. 그런데, 감염병은 신체만 괴롭히는 게 아니에요. 마음도 병들게 한답니다. 감염병에 대한 가장 주된 감정은 불안과 공포라 할 수 있는데요. “내가 코로나에 걸린 건 아닐까”, “나도 죽으면 어쩌지” 같은. 혹은 온갖 관련 정보에 집착하고 심할 경우 감염 걱정으로 불면증에 시달릴 수도 있어요. 주변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경계하게 되기도 하고, 사회적 관계와 외부 활동이 줄어드니 우울감이나 무기력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이런 걸 ‘감염병 스트레스’ 라고도 합니다.
소설 속 오랑의 시민들도 마찬가지인데요. 처음에는 페스트의 발생을 부정하지요. “에이, 설마”, “아닐거야” 하고요. 상황이 심각해질수록 점점 두려움과 불안이 커지고 미신을 비롯한 불확실한 정보들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도 하고, 오히려 죽음의 공포 따위는 상관없다며 향락과 유흥에 흠뻑 빠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요. 급기야 페스트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는 사방에 널린 죽음에 무뎌지고 절망과 좌절을 넘어 모든 상황과 감정에 무덤덤, 무감각한 상태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사실 어찌 보면 이런 다양한 반응들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기도 해요. 바이러스가 몸속에 침투하면 면역체계가 발동하듯, 우리 마음도 심리적 면역체계와 자원을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외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해석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걸 돕지요. 특히, 전염병처럼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그로부터 오는 불안감을 해소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마음은 면역체계를 가동하게 됩니다
물론 그 과정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항상 성공적인 건 아니에요. 때로는 상황의 부정, 감정의 억압과 부인, 사고의 왜곡이나 축소, 합리화 등을 사용하기도 하지요.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은 이걸 ‘방어기제’ 혹은 ’적응기제‘ 라고도 하고, 인지행동심리학자들은 사람이 가진 ’내적신념체계’ 라고도 하는데요. 무엇이 되었건 알고 보면 외부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적응하고 힘든 감정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우리 마음의 부단한 노력임에 틀림없어요.
지금도 우리 마음은 열심히 면역체계를 돌리고 있을 텐데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감염 예방을 위한 다른 노력들 만큼이나, 이렇게 코로나에 대처하는 건강한 마음관리도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즉, 우리 마음에도 마스크가 필요한 셈이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어떤 심리적 자원을 갖고 있는지, 혹은 어떤 면역체계를 발동시키는지에 따라서 상황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굉장히 달라질 수 있어요. 가령, 코타르는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페스트의 창궐을 즐기는 인물인데요. 죄를 지었지만 페스트 사태로 인해 체포가 미뤄졌고, 혼란의 틈을 타서 불법적으로 돈을 벌기도 합니다. 코타르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성찰하기보다는 상황 탓, 남 탓을 하는 미성숙한 심리적 자원을 사용하지요.(마스크 사재기 같은 놈들은 세상 어디에나 있나 봐요 ;;;)
상대적으로 보다 건강한 심리적 자원을 통해 마음의 면역체계를 구축하고, 페스트에 맞서 싸운 사람들도 있어요.
첫 번째는, 파늘루 신부인데요. 그는 신이 이 역경을 준 이유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 역경을 통해 인간의 신앙심이 깊어지고, 삶에 대한 지혜를 얻게 되리라 믿지요.
여러분을 죽이는 이 재앙이 여러분을 고양시키고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잔인하지만 신이 보시기에는 결정적입니다. 겉에서 볼 때 불의처럼 보이던 것에서 진리가 솟아날 것입니다.
심리학적 용어로는 이를 ‘영성’ 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써 인식하고 눈에 보이고 직접 경험하는 현실의 삶 이면에는 그 삶을 지배하는 보다 큰 존재나 원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또한 그렇기에 끊임없이 삶의 진정한 의미와 방향을 성찰하는 자세를 가지기도 하고요.
물론, 소설의 말미에 의사의 진료를 받는 행위조차 신이 주신 뜻을 어기는 것이라 여기며 죽음을 택하는 파늘루 신부의 신념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게 아니냐는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그가 가진 ‘영성’ 은 삶의 어떤 부조리한 장면에서도 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대로 살아가는 의지를 갖게 하는 훌륭한 심리적 자원이 아닐까 합니다.
반면, 소설을 끌고 가는 주인공인 의사 리외는 페스트는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믿는데요.
신이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볼 일이 아니라, 신을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것이 어쩌면 신에게도 더 좋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가 페스트라는 난관을 버티도록 돕는 심리적 자원은 의사로서의 ‘직업의식’과 ‘성실성’입니다. 리외는 하루하루 환자를 돌보며 상황을 낙담도 낙관도 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지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몰라요. 지금으로서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겁니다. ......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예전에는 성실한 사람들을 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여긴 적도 있는데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은 이렇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꾸준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참 멋지더라고요.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은 화려한 언행이 아닌 숭고한 성실성에서 온다는 생각도 들고요.(역시 존버는 승리합니다!) 지금 이 코로나 사태에도 리외 같은 숨은 영웅들이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랑베르와 타루는 훌륭한 ‘이타성’ 혹은 ‘연대감’을 보여주는 인물들인데요. 랑베르는 타지 사람이지만 일 때문에 오랑시에 들어왔다가 페스트로 인해 못 나가게 되고, 처음에는 어떻게든 도시를 탈출해서 사랑하는 부인을 만나러 가려고 애를 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도시에 남아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하는 인물이에요.
떠나지 않고 여기에 남겠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타루는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결정하는 사형제도의 모순을 경험하고 어떤 죽음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인간은 성자가 될 수 있는가를 고뇌하는 인물인데요. 자발적으로 보건대를 구성하는 등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페스트에 맞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지요.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면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평화를 기대할 수 있어요. 비록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선까지 행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의 내면에 미성숙함과 악함이 존재한다는 걸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소설 속에서 연대하는 모든 이들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공동체의 위기에 대처하는 선함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런 심리적인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 가장 분명하게 발휘된다는 데서 사람과 세상에 아직은 희망을 품게 만드네요.
코로나 바이러스의 기세가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지만, 소설 페스트 속 군상들의 대응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지 않을까요? 종교가 있다면 신의 존재를 통해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으며 잔인한 시련조차도 배울 점이 있다고 믿거나(영성),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상과 역할에 충실하거나(성실성), 나를 넘어서는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기부나 자원봉사 등의 일을 실천(이타성)할 수도 있겠지요.
혹은 앞으로는 나아질 거라는 낙천적인 ‘희망’과 이 위기 속에서도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 ‘감사’ 할 수도 있지요. 실제로 대구에 사는 저의 지인은 코로나 때문에 연락 끊겼던 지인들이 사방 곳곳에서 괜찮냐고 안부를 물어온다며, 코로나 덕분 아니냐며 감사해하더라고요^^;;
삶은 모호함과 불확실함의 연속입니다. 지금은 코로나19이지만 앞날에는 또 어떤 장벽이 우리의 삶을 가로막을지 알 수 없어요. 인생에서 크고 작은 코로나19가 다른 이름들로 불쑥불쑥 우리를 찾아올 거예요.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미래에 무슨 일이 생기느냐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예측 못한 불행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굳건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심리적 자원을 발견하고 튼튼한 면역체계를 개발시키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떤 심리적 자원을 갖고 계신가요? 지금의 상황에 탄식하고 불안에 휩싸이기보다는 내 안의 내면의 힘을 잘 길러보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응원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끝이 보일 거예요.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늦더라도 언제나 반드시 봄은 오게 마련이니까요.
*이 글은 <5명의 상담전문가가 함께 하는 심리학 파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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