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자의 마음책방 #1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선생님, 왜 살아야하나요?”
상담실에 오는 내담자들은 종종 제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 중에는 성적표에 적힌 숫자 하나에 울고 웃지만 그 숫자 뒤의 경쟁에 못 견디게 허무함을 느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반문하는 사춘기 고등학생도 있고,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 이제는 아무리 돈을 모아도 집을 살 수 있는 희망이 없다며 좌절하는 40대 가장도 있습니다. 때로는 현재의 삶이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잃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지금 당면한 어려움이 없더라도 딱히 살아있어서 더 좋을 것도 없다는 공허함과 함께 삶의 의미에 의구심을 품게 되기도 하지요. 이렇듯 삶이란 제각각의 이유로 모두에게 공평하게 친절하지 않은가 봅니다. 사는 내내 모호함의 연속이고 정답이 없는 숙제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정말 산다는 건 뭘까요? 여기에 이런 삶의 의미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한 작가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의식문제와 세상의 부조리를 다루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트 카뮈인데요. 카뮈는 ‘삶은 과연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가’ 란 물음에 답하기 위해 평생을 걸쳐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진지하고 통찰력 있는 사색은 그의 대표작인 <이방인>에 고스란히 녹아있지요. 어쩌면 우리는 카뮈가 창조한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삶을 어떻게 바라볼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라는 유명한 첫 구절로 시작하는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은 인간상입니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시종일관 덤덤하고 무심한 태도를 일관하고,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애도의 과정 없이 태연히 바닷가에서 수영을 즐기고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합니다. 결혼을 하자는 여자친구의 말에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하겠다” 라고 인생의 큰 결정 앞에서 아무런 고뇌나 책임감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마침내는 “태양빛이 강렬해서” 라는 이유로 권총으로 사람을 쏴서 죽입니다. 점입가경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에도 반성의 기미나 죄책감을 보이지 않고 왜 사람을 죽였는지, 장례식장에서는 왜 울지 않았는지, 세상의 규범과 관습을 잣대로 추궁하는 재판장의 검사와 배심원들에게 자신을 변명하기 보다는 그저 묵묵히 상황을 관망하지요. 다시 말해 여러 장면과 사건들 속에서 뫼르소는 삶과 자기 자신에게 일말의 열의가 없어 보이고 한없이 공허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카뮈는 왜 하필 이런 공감받기 힘든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걸까요? 저는 카뮈가 삶이 가진 본질적인 무의미함을 뫼르소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그가 어머니나 타인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삶이란 사실 덧없음을, 재판장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모습은 세상이 부여하는 각종 사회적 양심, 법, 의무와 책임 등이 한 사람의 정체성이나 삶의 의미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지요.
왜 살아야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먼저 삶이, 세상이 애초에 나에게 질서정연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줄 거라는 기대를 버리는 게 첫걸음은 일지도 모릅니다.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고 옷은 입기 위해 만드는 것과 같이 도구들에는 그들이 가진 태생적인 의도가 있지만 인간의 삶에는 그러한 목적성이 없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방황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도 그런 이유를 부여받지 않았고 무엇도 그 의미를 임의로 채울 수 없으며, 삶이란 원래 무질서하고 무의미하니까요. 그런 삶의 모호함과 의미 없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오히려 이에 좌절하지 않고 삶을 더 똑바로 바라보고 투쟁해나갈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삶의 한계와 제약을 끌어안으며 더 많은 자유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의미를 스스로 찾을 자유 말이지요.
카뮈는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작가입니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해나가며 어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그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보는데요. 그러므로 카뮈는 뫼르소라는 삶의 부조리와 무의미함을 대변하는 인물을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려는 자유의지야 말로 살아가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 너의 의지를 잘 휘두르며 멋지게 살아보라고, 그 과정에서 너만의 삶의 의미는 만들어질 거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그리고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면, 반대로 모든 것이 의미 있다는 반증도 논리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삶은 의미가 없으며, 또한 있네요.
결국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비상식적인 언행을 하고 세상의 틀 밖을 서성이는 이방인과 같은 뫼르소에게 연민보다는 부적절함과 불편함을 느끼지요. 그런데 사형선고를 받고 실행을 앞두고 있는 그 시점은 공교롭게도 소설 전체를 통틀어 뫼르소가 가장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때입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뫼르소는 강한 감정과 욕망들을 갖게 되지요.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러온 신부님에게 나를 제발 내버려두라고, 신이 있건 말건 그건 하등 중요하지가 않으니 방해 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오롯이 회상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소리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고 자신에게 보다 중요한 데 사유를 모을 수 있게 방에서 나가달라고 요청하지요. 그리고 장례식장에서는 울지 않았어도, 자신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왜 어머니가 황혼의 나이에 죽음을 앞두고도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약혼식도 올리고 싶었었는지, 어머니의 욕망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뫼르소를 보며 삶의 필연성과 본질은 이렇게 죽음을 가까이 할 때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죽음이야 말로 삶을 부질없게 만들지요. 결국은 다 죽을 건데 무슨 소용이겠어요. 하지만 죽음을 또렷이 인식할 때 삶을 더욱 생생히 음미할 수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은 제 몫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결국 모두가 죽음으로 향해 갈 테지만, 한 번뿐인 생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 죽음에 가까워질지, 어떤 죽음을 맞을 것인지를 우리 인간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조금 무섭고 두렵더라도, 삶 옆에 죽음을 나란히 두고 함께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죽음만큼 삶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주는 전제도 없으니까 말이지요.
지금까지 <이방인> 을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는데요. 카뮈는 삶의 무의미함을 먼저 직시하라는 메시지로, 죽음을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메시지로 이 난제를 꿋꿋이 헤쳐 나갑니다. 어떤가요. 삶의 의미에 대한 카뮈의 해결책이 마음에 드시나요? 왜 살아야하는지 의문이 드는 건, 그만큼 사는 데는 원래 거창한 의미가 없기 때문에,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역시 숨겨진 의도가 있기 보다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온통 불확실함 투성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합니다.
‘삶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살아야한다’ 카뮈가 한 말이기도 한데요. 저는 이 멀어 보이는 두 문장 사이의 간격을 좁혀나가고 그 사이에서 의미를 발견해나가는 일이야 말로 삶이 우리에게 주는 과제이자 선물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삶의 불친절함과 무의미함에 기어이 굴복하지 않는 애씀을,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자유를, 죽더라도 아직은 남아있는 살아갈 날들의 축복을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진흙탕 속에 뒹굴더라도 삶은 언제나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니까요^^
*이 글은 <5명의 상담전문가가 함께 하는 심리학 파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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