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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옌지 Jan 20. 2021

햇병아리 선생님, 학교 담장을 넘다.

3년 차 초등 교사가 핀란드 유학을 결심하기까지.

'해볼까?', '할 수 있을까?', '안되면 어떡하지?'




시간이 많이 흘렀다.


2015년 8월, 아니지...  3개월을 더 거슬러 가보자.

2015년 5월, 내 삶은 요즘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행복한 삶'이었다.


-안정적인 직장: 초등학교 교사. (오케이, 합격)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해외여행: 방학이 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가능함, 합격)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 꽤 존재함. (삶이 외롭지 않음, 합격) 

-평안하고 행복한 가정: 우리 아빠, 엄마가 최고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사실, 합격)

-젊음과 건강: 스물다섯 살, 주 3회 아침 수영. (덧붙여서 먹는 게 제일 좋아, 합격)


당시 어른들이 말하던 집과 차, 펀드와 같은 것들은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산다고?'

'빚??? 빚이라니?! 난 절대 빚은 안 질 거야.'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나에겐 관심 밖이었다.

난 그저 어른아이처럼 예금통장에 꼬박꼬박 정직하게 쌓이는 이자를 보며 흐뭇해했고, 행복했다.




나는 2년째 6학년 2반 담임을 맡고 있는 3년 차 교사였다. 우리 학교 6학년은 총 다섯 개 반이었는데, 모두가 기피하는 6학년을 1반부터 5반 선생님이 독수리 오형제라도 된 듯 "우리가 이 멤버 그대로 6학년을 한 해 더 하겠다!" 자원하여 2년째 함께 하고 있었다. 함께했던 다섯 분의 선생님들은 모두 경력 20년가량, 혹은 그 이상 된 '배테랑 교사'셨다. 거진 내 나이만큼 교사 생활을 한 것이니... 말 다했다. 선배 선생님들은 고작 경력 2년이 갓 넘은 햇병아리 교사인 나를 무척 아껴주시고 여러모로 배려('보호')해주셨다.



예를 들면, 교실 배치부터 난 안전했다. 

우리 교실 왼쪽 옆반, 6학년 1반 선생님은 조용한 카리스마로 아이들을 지도하셨다. 1반은 그림과 같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실제로도 대충 빨리 끝내고 놀고 싶어 하는 고학년의 특성은 찾아볼 수 없는, 꼼꼼하게 완성한 아이들의 미술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작품에서 담임 선생님의 카리스마가 철철 흘러나왔다.

우리 교실 오른쪽 옆반, 6학년 3반 선생님은 5학년 아이들이 "난 제~~발 내년에 6학년 3반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오 하나님, 부처님, 제발요~~", "3반 쌤 완전 무섭대."라고 수군거리며 간절히 기도할 만큼 호랑이 선생님이셨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훈계하고 딱밤을 '딱!' 소리 나게  때리며 아이들을 확! 휘어잡으셨다. 

이 두 반 사이에서 우리반 아이들은 "휴~~난 2반이어서 진짜 다행이야."라고 삼삼오오 모여 속삭이듯 이야기했고, '난 2반이어서 참 감사하다. 1반과 3반 선생님은 너무 무섭다. 우리반 쌤은 천사다.' 등의 내용은 학기 초 일기의 단골 주제였다. 덕분에 내가 특별히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아도 우리반 아이들은 양쪽 호랑이 선생님 사이에서 순한 토끼처럼 고분고분 조용히 지냈다. 그리고 "말 안 듣는 애들 있으면 우리 반으로 보내!"라고 말씀하시는 두 선배 선생님 사이에서 난 아무 걱정 없이 평화로운 푸른 풀밭에서 토끼들과 노니는 온순한 양 같은 존재, 햇병아리 선생님이었다.


그다음은 업무다. 교사의 업무라 함은 모든 선생님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매년 1월 말 2월 초면 업무분장을 둘러싼 교사 간 눈치싸움, 관리자와 교사 간 갈등이 치열하다. 이는 교사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지가 되어있는지, 교사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 댓글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다. '선생님 업무량 좀 줄여줘라. 애들 수업 준비 시간보다 행정 업무 시간이 더 많다더라.', '저는 현재 초등학교 교사인데요. 업무가 정말 많아서 아이들 학습지 풀게 하고 업무 해야 합니다. 공교육 정상화를 원한다면 교사 업무부터 좀 줄여주세요!' 

이런 현실 속에서 난 아주 운이 좋았다. '6학년은 업무 안 준다.'라는 원칙이 있었던 시기라...(요즘은 학급 수가 줄어 이마저도 사라졌다.) 학교 업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6학년은 학교 업무는 없더라도 졸업앨범 촬영, 수학여행, 중학교 배정 등으로 학년 자체에서 해야 하는 업무가 만만치 않은 학년이다. 그런데 우리 6학년은 그 업무가 나에게까지 오지 않았다. 배테랑 부장님이 세 분이나 계신 이 곳은... 나에게 업무가 오기도 전에 모든 업무를 다 하시는(해주시는)... 천국 같은 근무지였다. 아마 나를 가르치는 것보다 본인들이 하시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다고 생각하셔서 그러셨던 것 같다. 덕분에 난 그저 메신저로 보내주시는 '2015학년도 ㅇㅇ초 중입배정', '2015학년도 6학년 ㅇ반 졸업 앨범 촬영 명부' 등과 같은 엑셀 파일, 한글 파일을 열어서 우리반 아이들의 이름과 주소 등을 적는 '빈칸 채우기' 업무만 하면 됐던 것이다.




남들은 시간이 없다던데... 나에게는 남는 것이? 그렇다. 바로, 시간이었다. 시간이 많았던 나는 학교 도서관을 종종 찾았다. 당시 내가 했던 고민들은 '우리나라 아이들은 왜 공부를 싫어할까?', '왜 우리는 시험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야 할까?', '학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곳인가?',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일까?', '나는 앞으로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까?'와 같은 교사로서의 가르침과 교사로서의 나에 대한 것들이었고, 이 물음의 답을 책에서 찾기 시작했다.

'최고의 교육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북유럽의 외로운 늑대, 핀란드', '꼴찌도 행복한 교실, 독일 교육 이야기' 등 꿈같은 교육 시스템을 갖춘 다른 나라 이야기를 쓴 책을 읽고 있으면 

'정말 실제로도 이럴까?', '너무 이상적인 측면만 골라서 쓴 것은 아닐까?', '나도 이 교육 시스템 안에 들어가보고 싶다. 핀란드 학생이 되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문득 교직생활 1년 차 때 휴직제도를 알아봤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빠른 년생 때문인지, 아니면 이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졸업 직후 스물세 살 때부터 직장생활을 했다. 임용고시도 한 번에 붙고, 발령도 바로 났기 때문이다. 남들은 좋겠다, 잘됐다고들 했지만 난 왠지 그게 억울했다. 다른 친구들은 아직 자유로운 학생 신분으로 교환학생도 가고, 알바도 하면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데 난 왠지 너무 일찍 험난한 사회에 툭 던져진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교라는 공간에서 12년을 지내왔건만 다시 돌아간 직장으로서의 학교는 어쩐지 많은 것을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 곳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학교에 묶인 몸이 된 것만 같아 억울했다. 학교 탈출을 꿈꾸며 휴직에 관한 각종 공문서를 찾아보았지만, 내가 쓸 수 있는 휴직은 없. 었. 다. 그나마 가능해 보이는 것은 유학휴직이었으나 '지원 자격: 실경력 3년 이상'이라는 굵은 글자에 휴직의 꿈은 깊숙이 파묻혔다.

그리고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처럼 햇병아리 선생님도 소위 말하는 '사회생활', '직장생활'에 적응했고 2년의 시간이 지나자, 학교 담장 안에서 선배 선생님들의 보호를 받으며 평화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햇병아리 선생님이 꾸었던 학교 탈출의 꿈도 잊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휴직의 꿈은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책과 함께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맞아! 3년이었지? 그럼 내년부터 쓸 수 있다는 거잖아!' 

부푼 꿈을 안고 유학휴직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의 많은 사례들이 유학휴직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님들 커뮤니티에 들어가 봐도 '유학휴직 허가가 잘 안 난다던데...', '형식상으로만 존재하는 휴직제도', '휴직 안돼서 결국 교사 그만두고 유학 간 선생님 봤어요.'와 같은 부정적인 글이 대부분이었고,

"엄마, 나 유학 갈까?" 가볍게 던져본 물음에 엄마는 "에이~그냥 한국에서 편하게 살아. 무슨 또 공부야. 엄마는 우리 딸이 편하게 한국에서 교사 생활하면서 여행도 다니고, 건강도 챙기고. 스트레스 안 받고 행복했으면 좋겠어."라며 딸을 멀리 보내기 싫은, 엄마로서의 솔직한 심정을 내비쳤다. 



부정적인 아우라 속에 나는 유학 준비를 할까, 말까 갈등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외국인이 핀란드 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을지 일단 의문이었고, 합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 휴직 허가가 안 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해볼까?', '할 수 있을까?', '안되면 어떡하지?'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결론에 닿게 한 생각은 '도전했지만 실패했을 때 후회하는 마음'과 '도전 자체를  포기했을 때 아쉬운 마음' 중 무엇이 더 크나? 였다. 나는 도전하는 쪽을 택했다. 도전하지 않는다면 가능한 일도 스스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내가 먼저 불가능의 끈을 잡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의 결정 이후 2015년 8월, 토플 공부를 시작으로 12월까지 유학을 준비했고, 2016년 1월, 3곳의 핀란드 대학교에 지원서를 냈다.






이듬해.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합격 소식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지원한 세 개의 대학교 모두 합격했고, 엄마도 이쯤 되면 하나님 뜻인 같다며 유학 가는 것을 응원해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교육청에서 유학휴직 허가를 받는 것이었다. 유학휴직은 본봉의 50%가 지급되고 경력도 인정되는 휴직이기 때문에 허가 나는 것이 무척 까다로웠다. 합격통지서와 유학계획서, 학교장추천서 등 대학원 지원을 위해 준비했던 서류보다도 더 많은 서류들이 필요했다. 감사하게도 당시 교장, 교감 선생님께서는 나를 응원해주셨고 많은 도움을 주셨다. 떨리는 마음으로 교육청 장학사님께 서류를 제출하고 난 날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생각에 참 마음이 홀가분했다. 설령 불가능하다고 해도 최선을 다해서 도전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고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8월 무더운 여름날, 전화 한 통이 왔다.

"ㅇㅇㅇ 선생님이시죠? 저 ㅇㅇ교육청 ㅇㅇㅇ장학사입니다. 선생님, 유학휴직 허가를 내드렸습니다. 원래는 면접 절차가 있는데 유학 계획서를 보고 잘하리라 생각하여 면접은 생략하고 허가합니다. 잘 다녀오셔서 교육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멍했다. 

"엄마~~~!!! 나 진짜 가나 봐!!!"



2016년 8월 31일, 핀란드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그래, 유학을 간다. 햇병아리 선생님이 학교 담장을 넘었다.






'해볼까?', '할 수 있을까?', '안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들 땐 해보는 것이 답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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