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교육의 문을 열며.
"놀아야 공부도 잘한다!"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평등교육"
"3無(숙제, 시험, 경쟁이 없는) 학교"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핀란드 교육'을 묘사한 말이다.
각종 다큐멘터리와 책들을 통해 본 핀란드 교육의 모습은 정말 '이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것은 역으로
"공교육 붕괴"
"성취도 최상, 자신감 최하"
"승리한 사람도, 패배한 사람도 불행한 교육"
등과 같이 읽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한 말로 표현되는 우리(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을 더욱 무력한 것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저 무섭고도 슬픈 말들을 학생으로서 초중고를 거쳐 대학교육까지 16년의 대한민국 교육을 받고, 이제는 교사로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나조차 부인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난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놀아야 공부도 잘한다!"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평등교육"
"숙제, 시험, 경쟁이 없는 학교"
'이게 사실이야?'
'정말로 가능해?'
상상만 해도 꿈과 희망이 샘솟는 것 같은 이렇게 아름다운 교육이 가능한지.
정말 현실 속에 존재하는 시스템인지.
솔직히 다큐멘터리와 책은 제작자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핀란드 교사의 인터뷰나 작가의 글에서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핀란드 교육을 넘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마음으로 깊이 느끼고 싶었다. 핀란드에 가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곳의 학생이 되고 싶었다. 교육 탐방, 교육연수 등을 통해서도 핀란드 교육을 볼 수 있겠지만 난 그 이상을 원했다. 외부인의 시선에서 핀란드 교육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그 교육 시스템 속에서 교육을 받는 수혜자, 즉, 핀란드 학교의 학생이 되고 싶었다. 진심으로 핀란드 교육을 경험하고 싶었고 온 몸과 마음으로 그 실체를 확인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나는 들어간다. 핀란드 교육의 문으로. 그 이상적이라는 교육시스템 속으로.
그 첫 시작은 국제학생을 대상으로 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이었다.
솔직히 핀란드 학교로 내딛는 나의 첫 마음을 들여다보면 '핀란드 교육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영어에 대한 떨림과 두려움'이었다. 영어를 15년 넘게 배웠는데 아직도 영어가 두렵다니 잠시 한국 영어 교육 탓을 해보다가, '영어 못하는 학생 한 명도 대학 교육에서 포기하지 않고 도와주려나?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다며... 핀란드가 날 포기하진 않을 거야. 아닌가, 난 외국인이라서 해당 안되려나... 에라 모르겠다. 부딪쳐 봐야 알지.' 뭐 이런 배짱 좋은 마음으로 고쳐 먹는다.
#Educarium, Seminar2 (교육관, 세미나2실)
OT 장소를 찾아가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계단식 강의실에 벌써 학생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다. 난 뒷자리를 선호한다. '훗. 맨 뒤는 쫌 그러니까 (학부 시절 맨 뒤에 앉으면 교수님이 꼭 제일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고, 교사 생활을 하면서 회의 시간에 맨 뒤에 앉으면 교무부장님이 꼭 나를 앞에 앉으라며 부르셨다. 이런저런 좋지 않은? 기억들로 인해 맨 뒤는 피하는 편이다. '대체 어른들은 왜 맨 뒤에 앉으면 집중을 안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나 역시 우리 반에 관심과 사랑이 보다 필요한 아이들은 되도록이면 앞자리에 앉히려고 노력하는 건 왜인지.) 한 줄 앞에 앉아야지.'
아무튼! 학생이든 교사든 어떤 사회적 위치에서든, 나는 맨 뒤에서 한 줄 앞. 이곳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었고, 핀란드 대학교에서의 첫 날도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했다.
시작 시간이 되자 핀란드 학생들로 보이는 학생들이 "Tervetuloa! Welcome!" 하며 핀란드어와 영어로 환영 인사를 건넨다. 그러더니 갑자기 공부를 잘하려면 준비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신나는 음악을 틀고 몸을 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살짝 당황했지만 대세를 따르는 것이 제일 눈에 안 튀는 행동이기에, (이 곳에서 대세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신나는 척 따라 해 본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따라 해 보니 꽤 흥이 났다. 이들의 몸 풀기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본격적인 공부에 앞서 목도 한번 돌려보고요(목 돌리기)~~ 다리도 쿵쿵쿵 굴러보고요!" (쿵쿵쿵!)
"목을 좌우로 돌리며 옆사람과 인사도 한번 하고요~" (눈 마주치면 서로 멋쩍은 웃음)
"자, 우리 공부하려면 뭐가 필요하죠?"
"그렇죠! 연필로 글씨를 한번 써볼까요?" (연필을 쥔 척하며 공중에 팔로 아무렇게나 글씨를 쓴다.)
"더 크게 써볼까요? 좋아하는 그림도 그려보고요!"
"자! 그럼 책도 한번 펴볼까요?" (투명한 책을 펴본다.)
"아, 요즘은 노트북도 많이 쓰니까 노트북이나 태블릿 등 필요한 것도 준비해보죠" (각자 상상 속으로, 공중에 노트북과 태블릿 등 필요한 것들을 펼치는 행동을 한다. 타이핑을 하는 척 열 손가락을 움직이는 학생들도 더러 보인다.)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의 딱딱한 강의식 설명회보다는 졸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이 조금 열린 것도 같았다. 눈에 띄기 싫어하는 내가 손을 들고 퀴즈까지 맞춰서 학교 로고가 그려진 에코백을 선물로 받았으니까. (가방이 필요해서였을까? 아니면 조금은 자신감이 생겨서였을까?)
몸 풀기로 시작한 OT가 무사히 끝났다. 딱히 못 알아들은 영어는 없는 듯하여 마음에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영어 때문에 포기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Educarium, 402 (교육관, 402호)
이제 강의실을 옮겨야 할 때이다. 각 과별로 흩어지는 모양이다. 우리 과 국제 학생들이 모여 International officer(국제학생들을 관리 및 지원하는 역할)인 Anna(아나)와 함께 앞으로 이루어질 학업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듣는 시간이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한국 대학의 일반적인 강의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일단 책상부터가 삼각형이었는데, 이걸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핀란드 교육이 좀 다를 것 같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삼각형 모양의 책상에 앉아본 적이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없었으니까. 책상 모양 하나 가지고 뭘 그리 유난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책상 모양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일단, 삼각형 책상은 여러 개를 붙였을 때 다양한 조합으로 배치가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한 책상에 세명이 평등한 위치에서 토의할 수 있고, 책상을 두 개부터 여섯 개 이상까지 자유롭게 붙여서 사각형부터 육각형까지 다양한 형태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말이다.
게다가 이 책상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즉, 여기저기 이동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교수의 강의식 수업이나 특정 학생이 앞에 나와서 하는 발표식 수업에서 벗어나,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서 다양한 형태로 쉽게 토의하고 편안하게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여러 개의 삼각형 책상들이 모여 큰 네모를 그린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 구조에서는 앞자리와 뒷자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맨 뒷자리'가 없었다. '어디에 앉아야 할 것인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너무 고민하면 혹시나 도움이 필요한 줄 알고 아나가 말을 걸 수도 있으니까 빨리 결정하자. 아직까지 영어 말하기는 좀 많이 낯서니까 말이다.
일단 아나와 쫌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에 앉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제일 먼 곳은 역시나 마음이 조금 불편하니까 그보다는 하나 가까이 있는 자리를 가방으로 찜했다. 꽤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좌우로 바퀴를 살짝살짝 굴리며 강의실을 살짝 둘러보니 이 작은 공간에 TV가 무려 3개나 있다. 창문이 있는 면을 제외하고 강의실 세 벽에 TV가 각각 하나씩 놓여있는 것이다. 또 다른 차이점 발견이다. 동그랗게 앉든, 일자로 앉든, 어떻게 앉든 학생의 시야에서 정면으로 볼 수 있는 TV가 있다. 학생이 어느 위치에서도, 어떤 책상 배치에서도 수업에 편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인상적이었고, 핀란드 교육 환경이 우리나라보다는 학생 중심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열 명 남짓한 학생들이 모두 모이자, 아나가 간단한 소개를 하고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자고 제안한다. 어딜 가나 자기소개는 빠지지 않는 모양이다. 역시 아나와 조금 떨어져 앉기를 잘했다. 아나 바로 옆자리에 앉은 학생부터 자기소개를 시작해서 머릿속으로 세어보니 나는 대략 일곱 번째쯤이다. 한 명, 한 명 자기소개를 들으며 내 머릿속으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빠르게 되뇐다. 특히 미국에서 온 학생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잉글리쉬는 보다 완벽할 테니 말이다.
자기소개를 들으며 필요한 단어들을 캐치하다 보니, 금세 내 차례가 다가왔다. 영어로 말하는 것이 조금은 떨렸지만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짧고 간단하게 소개를 마쳤다.
이후 약 한 시간 반에 걸쳐 아나가 우리 과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소개하고 각자 공통수업, 전공수업, 선택수업 등으로 나누어진 계획표(Study Plan)를 세웠다. 기본적으로 2년에 걸친 과정이지만 그 이상 학업을 계획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아나가 친절하게 알려주고 한 명씩 계획표를 확인하면서 원하는 수업을 다 들을 수 있도록 꼼꼼히 도와주었다. 내 전공과 관련 없는 과목도 원한다면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교대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누군가가 이렇게 꼼꼼하게 앞으로의 학업에 대해서 계획하고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도 대학교에서 말이다.
핀란드 교육의 문을 연 첫날, 나는 적어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놓치지 않았다. 아니, 놓칠 수 없었다. 영어에 대한 긴장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앞으로 다가올 배움의 과정에 대해서는 편안했다. 외국인 학생들도 한 명, 한 명 챙기는 핀란드 학교 안에서 낙오자가 되기란 왠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핀란드 학생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