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내고 취업하는 AI 시대

AI는 생산요소의 ‘가격표’를 다시 붙인다

by 꿈공장장

요즘 미국 화이트칼라 채용 시장에서 낯선 현상이 나타났다. 최근 Wall Street Journal 보도에 따르면, 구직자가 리크루터에게 돈을 내고 일자리를 “소개받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기업이 리크루터 비용을 부담했다. 그런데 이제는 취업이 어려워지자 구직자가 월급의 일부를 수수료로 내거나, 월정액을 지불하고 연결 서비스를 구매한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돈을 내는 시장.


이 현상은 단순한 채용 트렌드가 아니다. 나는 이것을 AI 시대가 생산요소의 가격체계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호로 본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마이너스 금리라는 이름으로.


가격표가 흔들릴 때 벌어지는 일

경제는 결국 가격표의 문제다.


노동의 가격은 임금이고, 자본의 가격은 금리다.


평소에는 이 질서가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노동이 부족하면 임금이 오르고, 자본이 부족하면 금리가 오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본의 가격이 마이너스가 된 적이 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오히려 비용을 부담하는 현상이다. 그것은 자본의 희소성이 사라지고 과잉과 안전자산 선호가 겹쳤을 때 나타난 가격 왜곡이었다.


지금 노동시장 일부에서 비슷한 장면이 보인다.


명목 임금이 마이너스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취업에 이르기까지 드는 비용—소개 수수료, 구직 대행료, 재교육 비용, 긴 구직 기간 동안의 생활비—을 모두 합치면 어떤 사람들에게 “일자리의 순수익”은 급격히 낮아진다.


노동의 가격표가 조용히 흔들리는 순간이다.


AI는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AI를 두고 “생산성을 올린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AI는 단순히 생산량을 늘리는 기술이 아니라, 생산요소의 의미 자체를 바꾸는 기술이다.


첫째, 기술 발전의 속도를 가속한다. AI는 연구, 설계, 분석, 기획의 시간을 단축한다. 기술이 한 단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오르는 속도가 올라간다.


둘째, 노동을 재분류한다. AI와 결합하면 더 강해지는 업무가 있고, AI가 대신해버리는 업무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잘 쓰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먼저 대체한다.


같은 화이트칼라라도 결과는 달라진다. 평균이라는 말이 개인의 체감을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다.


셋째, 기업가정신의 가치가 커진다. 기술 속도가 빨라질수록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자원을 배치할 것인가’이다. 같은 인력과 같은 자본으로도 어떤 조직은 AI를 활용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어떤 조직은 자동화 경쟁 속에서 가격 압박만 받는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노동시간이 아니라 판단, 실험, 리스크 감수, 상업화 능력이다. AI는 이 판단의 레버리지를 키운다.


평균은 오르지만, 체감은 갈라진다

그렇다면 임금과 금리는 어떻게 움직일까.


이론적으로는 생산성이 오르면 임금도 오를 힘이 있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평균과 분배가 다르게 움직인다.


- 대체되는 직무는 임금 하락 압력을 받는다.
- 기업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 취업을 위한 준비 비용이 개인에게 더 많이 전가된다.


Wall Street Journal이 보도한 ‘구직자가 비용을 지불하는 리크루팅’ 사례는 이러한 구조적 압력이 특정 시장에서 표면화된 장면일 뿐이다. 지금은 미국 이야기지만, 기술 변화가 동일한 속도로 확산되는 이상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금리도 마찬가지다. 기술 발전은 투자 기회를 늘려 금리를 끌어올릴 수 있지만, 동시에 자본 과잉과 안전자산 선호가 겹치면 금리는 눌린다.


핵심은 단순하다.


AI는 평균을 올리는 힘과, 분배를 흔드는 힘을 동시에 가진다.


가격표가 바뀌면 전략도 바뀐다

마이너스 금리는 자본의 가격표가 흔들린 사건이었다. 유료 리크루팅은 노동시장 일부에서 가격표가 흔들리는 사건이다.


두 현상은 다른 시장에서 벌어졌지만 같은 질문을 던진다.


기술이 빨라지고 생산요소가 넘칠 때, 누구의 가격이 오르고 누구의 가격이 내려가는가?


AI 시대의 불편한 진실은 이 질문이 더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승패를 가르는 것은 단순한 근로시간이 아니다. 인적자본의 재구성, 기술과 결합되는 직무 선택, 그리고 무엇보다 자원을 어디에 둘지 결정하는 기업가적 판단이다.


기술은 사회의 평균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평균이 오르는 동안 어떤 사람은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어떤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쪽으로 밀려날 수 있다.


지금 벌어지는 변화는 단순한 기술 진보가 아니다. 생산요소의 가격 질서가 다시 쓰이는 과정이다.


정리해보면

임금은 노동의 가격이고, 금리는 자본의 가격이다.

AI는 기술 수준뿐 아니라 기술 발전의 속도까지 바꾼다.

평균 생산성은 오를 수 있지만, 직무별 보상은 갈라질 수 있다.

AI를 잘 쓰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먼저 대체한다.

AI 시대의 핵심 역량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자원을 둘지 판단하는 능력’이다.


— 박규서의 AI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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