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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Hunter Aug 01. 2023

시드니는 비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

어쨌거나 기분이 착잡한 날인데 퇴근길에 비도 내려서 옷까지 젖어야 하니 더욱 짜증이 난다. 


수요일인 오늘은 재활용 쓰레기 내어놓는 날인데 몇 달째 수요일은 비라 우산도 쓰지 못하고 쓰레기 통을 두 개나 끌면서 집 앞까지 내어 놓는 수고는 전혀 유쾌하지 못하다. 쓰레기를 얼른 내어 놓고 들어 오려는데 몇 번인가 보았던 추레한 할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우비 삼아 뒤집어쓰고 다 부서진 유모차를 끌고 우리 동네 노란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빈병을 뒤진다.


아무리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하셨어도 한국 사람인 나는 한국 할머니임을 10미터 밖에서도 한눈에 알아본다. 집으로 발길을 향하다가 문득 나중에 쓰려고 모아 놓은 빈병 봉지가 떠올랐다. 그리곤 가서 혹시 모르니 영어로,


“Mam, I got some empty bottles if you want!”


했더니 고개를 더욱 푹 숙이시고 못 들은 척하신다. 내가 괜스레 시비 거는 호주 놈이라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래서, 


어머니제가 빈병  있는데 가져다 드릴까요?” 했더니 그제야


.. ..” 하신다.


얼른 집으로 와서 빈병을 챙겨서 나가는데 그냥 가려니 자꾸 눈에 뭔가 밟힌다. 행여 더 드릴만한 것이 뭐 없을까? 아, 그래 술꾼 후배들 준다고 챙겨 놓은 막걸리가 있다. 술 드시려나? 괜한 짓 하는 건가.. 하면서 혹시 모르니 한 병 챙겨 간다.


어머니이거  병이에요여기에 넣을까요?” 하고 유모차 안 쪽에 병들을 쏟아 넣고

이거는 그냥 드세요.” 하고 막걸리랑 음료수 한 병을 같이 드리니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시다가

사장님이거는 빈병이 아닌데요?” 하고 날 쳐다보시는데 두 손으로 받는 얼굴이 아주 시커멓다.

그거는 그냥 드세요.” 하고 돌아 서는데 날 향해 꾸벅 인사를 하신다. 그 순간

다음에도  오세요.” 외치고 돌아서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어찌 한국 할머니가 호주까지 와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할까? 

그나저나 저러다 이상한 호주 놈한테 해코지는 당하지 않을까...

그리곤 전혀 존경하지 않는, 고국 계신 엄마 생각도 살짝 났고.


이런 생각 끝에 집에 들어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운영하는 유도부를 찾는 전화가 온다. 한국에서 유도를 했던 아버님인데 이번에 중학생이 된 아들을 유도시키고 싶어 연락했단다. 새로운 유도부 식구가 생기는 일이라 나로서는 기뻤지만, 미신도 싫고 아무 연관도 없는 독립된 두 사건이 무슨 인과응보라며 호들갑을 떠는 성격은 더욱 아니라지만 그저 맘이 복잡하다.


다시 비가 오는 시드니에서.



시드니, 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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