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일 만의 짧은 여행

배울 게 이것뿐이겠는가?

by 자유와 예술



나는 눈을 뜨자마자 냉수를 마신 다음 대충 씻고 집을 나선다.

에코 백에는 엘리스 먼로의 『거지 소녀』, 돋보기, 선글라스, 이어폰, 갈아입을 반팔 티셔츠, 손수건, 양산, 빵을 욱여넣는다. 티백 도라지차를 우려내 냉장고에 반나절 보관한 텀블러를 파우치에 넣고 어깨에 멘다.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창 넓은 모자를 쓰고 헐렁한 바지를 입은 채.

집 앞 정류장에서 동대구역 가는 버스를 탄다. 여유가 넘쳐나는 그곳에서 나는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다. 어디 갈까? '지금 여기만 벗어나면 다 괜찮다.' 산? 강? 바다? '당연히 바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좋은 곳?

'부산 해운대!'

드디어 갈 곳이 정해진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많은 건 시간이니 최대한 느리면서 여러 곳을 거쳐 가는 길고 긴 노선을 고른다. 목적지는 신해운대역! 경주와 울산을 거치는 노선. 자그마치 2시간 12분이나 걸리는, 내게 딱 안성맞춤이다. 휴대폰에서 기차 시간을 확인하니 30분 이상 여유가 있다.

카페에서 따뜻한 라테를 주문한다. 승차권을 제시하니 10% 할인이다. 마치 엄청난 횡재를 한 것처럼 절로 미소가 번진다. 420원이라는 소박한 선물이 건네는 큰 감동. 이게 바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인가! 집에서 챙겨 온 곰보빵과 라테의 환상적인 조화에 내 가슴은 벌써 이루 말할 수 없는 감탄으로 그득하다.


6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 스위스와 이탈리아에 다녀온 후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칩거에 들어갔다.

미리 정한 나이에 도달했으니 직장에 출근할 의무가 사라진 데다 쓸데없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모임엔 당최 흥미가 없으니 어쩔 수없이 칩거할 수밖에. 물론 항상 집에만 머문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세 가지 활동은 여전히 꾸준하게 했다.

일요일에는 4시간 동안 대구 박물관에서 전시해설 자원봉사를 한다. 그다음엔 그곳 카페에서 네 시간 정도 글을 쓰고 책을 본다. 수요일에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네다섯 시간을 그림에 몰입한 후 집에 갈 때는 걸어간다. 두 시간 이상 걸리는 7.5킬로미터를. 금요일에는 도서관에서 3시간씩 특강을 듣는다. 대학교에서 미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진행하는 「미술을 이해하는 안내서」라는. 12주간 진행하는 강의를 듣고 나면 내 영혼이 정화된 느낌에 그지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나머지 시간엔 아파트에 있는 커뮤니티 공간에서 종일 책을 읽고 원고를 수정한다. 덕분에 지난해 출판한 『글쓰기 오디세이』개정판을 마무리하고 적잖은 책을 읽었다.

저녁 7시쯤 집을 나가 2시간 자전거 타고 1시간 걷는다. 밤 10시에 하루 일과가 끝난다.

'아, 또 하루를 보냈구나.'

매일매일 반복되는 이런 삶도 그리 나쁘진 않지만 뭔가 허전하다. 새장에 갇힌 새가 하릴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듯하다. 좁은 우리에 갇힌 다람쥐가 무료함을 달래려고 쳇바퀴를 돌리지만 끝내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이렇게 수십 년을 살아야 하는가?'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거나 차창 밖 풍경을 보거나 살포시 잠을 자다 보니 어느새 신해운대역이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낯선 곳이다. 마치 시골 어느 간이역 같은, 한적하고 느긋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여느 대합실과 사뭇 다르다. 기차역이면 흔하디 흔하게 보이는 ‘story way’라는 편의점조차 없다. 해운대해수욕장과는 3.5킬로미터 떨어진, 해운대구 좌동. 좌동을 지나면 중동, 그다음은 우동. 동네이름이 너무나도 간단 명료하다. 왼쪽, 중간, 오른쪽 순서 대로 지었다. 상동, 중동, 하동처럼.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 나는 양산을 꺼내 든다. 창 넓은 모자를 고쳐 쓴다. 운동화 끈을 살짝 조인다. 그리고 걷는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의 감촉이 대구에서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마치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하듯 부드럽고 달콤하고 포근하다. 숨통을 끊어놓을 듯이 압박하는, 얼굴을 마구 할퀴듯 거칠게 부딪치는 대구의 바람과는 결이 다르다. 조금이 아니라 확연히 다른 바람. 태어난 배경과 살아온 환경이 완전히 다른 종족처럼.


드디어 마주한 해운대 해수욕장!

질서 정연하게 놓인 울긋불긋한 파라솔이 모래사장에 점점이 박힌 모습을 보자 내 가슴이 덩달아 요동치기 시작한다. 잠시의 주저함과 머뭇거림 없이 신발과 양말을 벗고는 곧장 바다로 달려간다.

'앗, 뜨거워!'

작렬하는 태양빛에 잔뜩 달궈진 모래들이 일제히 나의 여리고 여린 발바닥을 공격한다. 여름 내내 시원한 곳에서 편하게 지낸 그 발바닥을 향해 원망을 내뱉고 심하게 질투라도 하듯이. 쉴 새 없이 일렁이는 파도가 있는 곳까지는 채 50미터도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급하게 그늘진 곳으로 피신한다. 수상안전요원이 근무하는 높다란 전망대 아래. 다시 신발을 신을까 고민한다.

그때 어느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맨발로 걸으며 내 곁을 지나간다.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를 유심히 쳐다본다. 그의 걸음걸이가 특이하다. 모래밭 위가 아니라 모래밭 속을 걷고 있다. 그의 발바닥은 햇빛에 달궈진 모래가 아니라, 약간 물기를 머금은 모래들과 대면하고 있다.

'아! 이건 생활의 지혜다. 유심히 살펴보면 배울 게 이것뿐이겠는가!'

나는 앞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두 귀를 활짝 열고 겸허한 마음으로 많은 걸 배워야 할 것이다. 여태 배우지 못했다고 그냥 포기할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차근차근 배워야 한다. 설령 배워서 남 주더라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넓고 크다.


드디어 바다!

두 발을 바닷물에 담근 그 순간, 묘한 떨림이 가슴 가득 차오른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바지를 적시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차마 용기가 없어서 온몸을 물속에 담그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여분의 바지를 챙겨왔다면 나는 아마도 내 몸을 바다로 내던졌을 것이다. 땀을 흘리면 갈아입을 요량으로 반팔 티셔츠는 두 벌이나 챙겼지만 정작 반바지는 생각조차 못 했다. 바캉스 철이 지난 뒤라 물속엔 고작 몇 명만 있을 뿐 대다수는 백사장 언저리에서 파도와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끝! 허무한 끝맺음.

이 세상 그 모든 끝처럼, 계절의 끝은 언제나 처량하고 씁쓸하다. 단번에 육지를 점령하고 말겠다는 맹렬한 기세로 힘차게 달려든 파도는 어느새 하얀 포말만 남긴 채 스르르 허물어진다. 마치 풍차를 향해 돌진했다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내빼는 돈키호테처럼. 끝! 허무한 끝맺음. 이 세상 그 모든 끝처럼, 끝은 언제나 처량하고 씁쓸하다.

파도는 제 혼자만 물러나는 게 못내 아쉬운지 모래를 함께 데려갈 작정이다.

어쩔 수 없이 소멸의 길로 나아가는 제 서글픈 심정을 함께 달랠 길동무로. 파도에 이끌려 물속으로 마구잡이로 끌려들어 가게 된 모래는 제 운명에 저항하겠다고 다짐한다. 내 발바닥을 힘차게 부여잡고 안간힘 쓴다.


달이 차면 기울 듯 이미 대세는 정해졌다.

자연의 법칙은 거스를 수 없다. 거스를수록 고통스럽고 구차할 뿐이다. 모래는 금세 힘에 부쳐 두 손 높이 들고 항복한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르지도 못한 채 가뭇없이 사라진다.

새삼스레 지난 60년의 세월이 스치듯 지나간다. 맹렬한 기세로 세상을 향해 돌진했지만 끝내 그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한 채 주저앉아버린 지금의 내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도도한 흐름을 반드시 돌려놓고야 말겠다는 그 포부는 당찬 용기 또는 굳은 의지가 아니라 그냥 철없음이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주어진 행운을 이미 다 소진했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렇다고 포기하자는 소리는 아니다. 미련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특히 부질없는 헛된 꿈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팔월 말인데도 여전히 따가운 태양빛을 머리에 잔뜩 얹은 채, 나는 백사장을 이리저리 느릿느릿 오가며 한참을 즐긴다. 언제 다시 이 바다를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으니 지금 이 순간을 흠뻑 즐겨야 한다. ‘나중에’라거나 ‘다음에’는 없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는 ‘지금의 성공에 도취하지 말고 겸손 하라’는 의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일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니 여기 지금에 집중하라’는 의미도 있다.


여름 끝자락에 제대로 마주한 따가운 태양빛에 금세 피부가 붉게 변했다.

이젠 서늘한 곳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어디를 갈까?’ 다음으로 중요한 게 ‘무얼 먹을까?’다. 아련한 추억이 있는 복국 집에 갈 것인가,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인 밀면을 먹을 것인가.

이미 흘러간 과거는 그냥 묻어두어야 한다. 애써 꺼내본 들 결코 다시 돌이킬 수 없다. 날이 갈수록 아련해지는 그 추억을 들춰본 들 아무 소용 없다.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그냥 두어야 한다. 헤집지 않고 고스란히 밀봉한 채로. 나는 오로지 현재를 살고 있다. 과거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한 채 지낼 순 없다. 그러니 오롯이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밀면을 먹기로 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대략 10분 정도 걸으면 꽤 유명한 집에 닿을 수 있다. 양산을 쓰고 모자를 눌러쓴 채 뚜벅뚜벅 걷는다. 한창 시간이 지났지만 꽤 많은 손님들이 북적인다. 아뿔싸!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크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메뉴판을 보니 온통 냉면과 갈비뿐이다. 상냥한 얼굴로 물과 물수건을 건네는 점원에게 묻는다.

'여기 밀면은 없나요?'그는 온 얼굴에 웃음을 띤 채 대답한다. '여긴 냉면 전문점이에요.'

인터넷 검색 창에 분명 ‘해운대 밀면 맛집’으로 입력했는데. 포털 사이트의 원래 뜻처럼 정문(portal)에서는 세부사항을 잘 모르는 법이다. 밥이냐 고기냐 면이냐가 중요할 뿐 냉면인지 국수인지 라면인지 밀면인지는 검색한 사람이 자세하게 판단할 몫이다.


나는 순간 고민한다.

'그냥 냉면 먹을까?' 아니다. 대충은 없다. 설령 중간에 길이 어긋나더라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그 흔하디흔한 노력이 삶을 다른 곳으로 이끌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최대한 상냥하고 공손한 태도로 점원에게 다시 묻는다. '혹시 이 근처에 밀면 집이 있을까요?'

그 점원 역시 미소 가득 띤 얼굴로 화답한다.

'밖으로 가서 왼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전통시장이 있는 데 그곳에 가면 밀면 집 있어요.'

친절은 친절로 보상받는다. 나는 에코 백을 어깨에 울러 메고 벗어놓은 모자를 다시 쓴다.

'고마워요. 다음에 꼭 여기서 식사할게요.'

그 말을 남긴 채 식당을 나간다. 순간 머쓱한 기분이지만 뒤통수가 가렵지는 않다. 내게 친절을 베푼 그 점원의 말과 행동을 믿기 때문이고 내가 내뱉은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시장 입구에 자리한 식당에 들어선다.

2인석, 4인석, 6인석 등 다양하게 구분된 실내엔 절반 이상 비어있다. 이미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데다 식당 자체가 꽤 크다. 여느 관광지에서 흔히 보이는, 단체 손님을 맞이하는 그런 식당이다. 너무나 능숙해 마치 기계처럼 느껴지는 점원의 행동에서 매뉴얼과 프로토콜을 떠올린다.

혼자라는 신호로 오른손 검지를 들자 곧바로 2인석 테이블로 안내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거의 자동이다. 주위에 4인석 테이블이 여러 개 비어있음에도 나는 좁디좁은 2인석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테이블마다 메뉴를 선택해 결재하는 키오스가 턱하니 자리 잡고 있다. 내 의향을 묻지도 않은 채 이미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공간은 좁아지고 시야는 제한되고 젓가락을 움직일 때 불편하다.


나는 두 달 전 이탈리아에서 ‘돌로미티’를 둘러본 후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레스토랑을 떠올린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정 조끼를 갖춰 입은 멋진 점원들이 서빙하던 그곳에서 제대로 느낀 인간 존엄성의 의미를.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분주하고 손님이 가득했지만 저들은 홀로 들어선 나를 4인석 테이블에 앉게 했다. 미안한 마음에 식당 밖 테라스에서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불편한 마음 없이 느긋하고 우아하게 야채볶음에 맥주를 곁들이며 한껏 즐거워했다. 매출용 고객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의연한 손님으로 맞이한 그들의 태도는 쉽사리 잊지 못할 멋진 추억이다.


나는 촉촉한 비빔면을 주문한다.

완전한 비빔이 아니라 물기가 자박자박한데 색다르게 맛있다. 메인보다 더 좋은 게 따뜻한 육수! 더운데 걷느라 적잖은 땀을 흘렸으니 약간 짭짤한 육수가 어찌 달콤하지 않겠는가. 연거푸 두 주전자를 마신다.

밀려오는 포만감! 우연찮게 들른 식당에서 실망하지 않은 것만 해도 성공한 것과 다름없다.(원래 ‘진배없다’고 썼다가 ‘다름없다’로 고쳐 쓴다. 지금이야 공식 사전에 표준어로 등재됐으나 한때는 사투리였으니 될수록 지방 사람 같지 않게 보이려고. 물론 그렇다고 내가 지방 사람이 아닌 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중앙 사람처럼 보이고 싶기는 하다.)


어느 곳을 가든지 여러 곳을 빠르게 둘러보지 않고 오직 한 곳에서만 지긋하게 오래 머물고자 한다.

오늘은 이곳 해운대 해수욕장만 들러보면 그만이다. 그토록 원한 바다를 보고 밥을 먹었으니 이젠 지친 몸을 쉬어야 할 때다. 여기저기서 받은 교환권을 쓸 요량으로 스타벅스에 간다. 『모비 딕』과 『오디세우스』를 연상시키는 그곳에서 따뜻한 라테를 마신다. 나는 일 년 내내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얼죽아’는 나와 무관한 딴 세상 이야기다. 나이가 든다는 확실한 징표. 어쩔 수 없다.

누구든 다 늙어간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끝없이 전진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캐나다의 가수이자 시인인 레너드 코헨은 죽음을 ‘불굴의 패배(invincible defeat)’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어폰을 휴대폰에 연결한다. 유튜브에서 ‘그냥 틀어놓기 좋은 카페 음악’을 고른다. 나는 책을 읽는다. 앨리스 먼로가 1978년에 쓴 『거지 소녀』.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호기심. 그 어떤 욕망보다 더 줄기차고 긴급한 것. 그 자체로 욕망인 것.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뒤로 물러나 지나치게 오래 기다리면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게 이끄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이런 지경에 이른 사랑을, 이토록 무력하고 가망 없고 미친 듯 몰두하는 사랑을 어찌할 수 있을까? 제대로 깨져야만 할 것이다. 아무리 겁을 내고 소심하게 굴더라도, 그 어떤 충격과 불길한 예감에 시달린다 해도, 생존법을 배우는 것은 비참하게 사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기엔 너무 흥미롭다.”



이젠 돌아가야 한다.

때때로 꾸벅꾸벅 졸고 카페 앞을 지나가는 숱한 사람들의 생김새와 행동을 관찰하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돌아가면 급히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기에 머물 수도 없지 않은가.

귀소본능은 인간의 오랜 습성이다.

낯선 곳의 설렘과 두려움보다 친숙한 곳에서의 익숙함과 안락함을 더 좋아하는, 항상성 또는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를 추구한다. 특히 삶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더 다가갈수록 그 경향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환경 변화에 따라 새로운 균형을 찾는 알로스타시스(allostasis)는 저 멀리 있다.

나는 신해운대역까지 걸어간다.

한번 봤다고 눈에 들어오는 간판이 낯설지 않다. 마치 오랫동안 이곳에 머문 것처럼 모든 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화장실에서 땀으로 찌든 상의를 갈아입는다. 머리 매무새를 가다듬고 말끔히 세수한다. 이젠 동해남부선이 아니라 경부선을 이용한다. 부산역, 구포역, 밀양역, 청도역을 거쳐 동대구역으로 간다. 기차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새마을호를 탄다.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하다.


느닷없이 떠난 여행은 무탈하게 끝맺음했다.

구월이 코앞이라 유달리 하늘이 드높고 맑다. 나는 새파란 하늘에 무심히 떠다니는 하얀 구름처럼 느릿느릿 살아가리라 마음먹는다. 아등바등 애쓰지 않고, 막히면 돌아가고, 안 되면 담대하게 포기하는 마음으로. 싫은 사람 안 보고, 싫은 거 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음껏 향유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