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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 Little Cosmos Jul 09. 2020

실패의 문이 열리는 순간.

승무원 교육생의 모의대피훈련기.

 또각또각 경쾌한 하이힐 굽 소리를 내며, 단정한 올림머리를 한 제복의 무리가 공항을 가로질러간다. 내 나이 열일곱에 생애 처음으로 가 본 공항에서, 본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런 어웨이에 선 모델처럼 터미널 라운지를 멋지게 가로질러 걸어가던 승무원들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비행기를 처음 타 보았던 날이기도 했다. 승무원 언니들을 멀리서 지켜보며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키가 작고 외모도 평범했으니, 외모가 중요한 직업을 꿈꿔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내가 정한 진로는 드라마 작가였다.


 어릴 때부터 뭔가 끄적거리기를 좋아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이야기에 큰 매력을 느꼈다. 작가는 돈 벌이를 못한다는 가족들의 만류에, 글에 대한 꿈은 펼쳐볼 생각도 없이 가슴 깊이 묻어놓았던 것 같다.

 어느 날 승무원이 꿈인 같은 과 단짝친구를 따라 우연히 들른 승무원 학원에서 키가 작아도 얼굴이 평범해도 승무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라고 여겼던 승무원의 세계가 한 걸음 가까이 내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영어 인터뷰를 잘 준비하고 단정한 이미지를 줄 수 있다면 외국항공사의 승무원 면접은 준비 해볼만하다는 자신감을 얻고 친구와 준비하기 시작했다. 높은 암리치는 키가 160센치도 안 되는 내게 여전히 큰 장벽이었다. 암리치는 팔을 위로 뻗어 손이 닿는 거리를 말한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벽을 짚어도 저 만치 그어져 있는 암리치 선은 닿을 수 없는 하늘처럼 아득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다리를 맞바꾼 인어공주의 심정이 이랬을까. 차오로는 눈물을 뒤로 한 채 벗어놓은 구두를 신고 면접장을 나오던 기억이 난다.


 암리치에서 탈락하는 몇 번의 고베 끝에 키 제한이 없는 외항사 지상직 승무원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첫 도전 만에 합격하여, 중동의 한 항공사에 입사를 했다. 지상직으로 근무를 하며 다양한 국적의 동료들과 울고 웃으며 힘들지만 잊지 못할 1년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중동에서 돌아 온 후,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자유로웠던 해외생활을 더 해봐도 되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렇게 미국 이민을 결심하고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적응이 되어 갈 때 쯤, 내가 좋아했던 항공사 일을 하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미국 항공사의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미국 항공사들은 대부분 승무원 채용조건에 키를 필수조건으로 보지 않는 다는 걸 알게 되었고, 두 번째 도전 만에 미국 메이저 3대 항공사 중 한 곳에 합격하였다. 드디어 내게도 접어둔 승무원의 꿈을 펼쳐지는 날이 오는가 싶었다. 이제는 앞날이 탄탄대로 일 줄만 알았다.  


 면접에 합격한 예비 승무원들은 총 6주반의 교육기간을 거친다. 이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시험을 보고, 기준 점수에 도달하는 교육생들만 졸업해서 정식승무원이 될 수 있다. 교육이 시작 된 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달아 이어지는 수업을 듣고 하루걸러 시행되는 매 시험에서 80점 이상의 성적을 내느라 피가 마르는 나날들을 보냈다. 영미권 국가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나는 매일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전문 용어와 원어민들조차 낯선 고급 어휘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암기할 내용은 산더미인데,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야만했다. 그렇게 피말리던 이론 수업이 끝나갈 쯤 모의 훈련의 시간이 찾아왔다.

 교관들이 교육 첫날부터 강조하던 대피훈련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가장 많은 교육생들이 불합격을 받고 퇴소조취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터라 모든 교육생들이 바짝 군기가 들어있었다.

 비행기 사고 시에 전문 소방대원처럼 승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훈련인 만큼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비행기 안을 내 손바닥 안처럼 내다보고 각자의 포지션에서 승객들을 대피시키는 훈련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작은 실수에도 호랑이 교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승무원이 그저 커피나 따르는 웨이트리스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런 생각이면 짐 싸서 당장 집에 가세요, 당신 손에 승객들의 생명이 달려있습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훈련 교관들은 악명 높은 해병대의 빨간 모자 교관처럼 웃음기를 싹 지우고 독한 말로 교육생들을 채찍질 했다. 한국말로 하라고 해도 입에 안 붙을 대피 구호를 영어로 외치며 순서가 정해진 대피동작을 외워 함께 해야 하니 몸 따로 마음 따로 였다.

실제 승무원들의 모의 대피훈련 사진 ( 출처: Japan Airlines website)

  모두가 두려워하는 대피 훈련 시험의 날이 왔다. 나는 가장 중요한 포지션 중에 하나인 비행기 뒷문을 여는 포지션을 받았다. 이 포지션만 아니길 바랐었다. 문을 여는 순서와 동작을 칼같이 정확하게 지켜 해야 하는 중요한 포지션이었기에 가장 자신이 없는 포지션이었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Release your seatbelt, Get out! Leave everything, Stand back stand back...”


나는 대피 구호를 외치며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연습 때는 잘 열리던 문이 안에서 쇳덩이가 번식이라도 한 것인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활짝 열려야 할 문이 천천히 들리다가 맥없이 철커덩 닫혀버렸다. 당황한 나는 작아지는 대피구호를 외치며 옆에서 매의 눈초리로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채점하는 교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습 때도 없던 상황이라 1초가 한 시간 같았다. 교관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손잡이를 돌리고 비행기의 문을 힘껏 밀어 젖혔다. 두 번째 시도에서 더 많이 열리긴 했지만, 또 다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망연자실 문이 닫혀 버렸다. 아 여기서 나는 실패하고 집으로 보내지겠구나, 그 짧은 몇 초의 시간동안 오만가지의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두 번이나 문을 못 열고 있으니, 나는 불합격이겠지, 내 팔자에 역시 승무원은 없는 건가’ 그 때 반대편 문을 담당한 동기의 대피 구호 소리가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문을 벌써 열어 재치고 승객들을 한 명 한 명 대피시키고 있었다. 멀리서 다른 동기들의 대피 구령이 우렁차게 들려왔다. ‘불합격이더라도, 이 문은 열자, 다른 동기들을 위해서라도 대피는 끝마쳐야해.’ 나는 마지막으로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 모아 문을 힘껏 밀기 시작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문이 드디어 활짝 열렸다. 남은 대피 절차를 따라 잡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남은 구호를 외치며 안에 있던 승객을 모두 대피시켰다. 시험이 끝난 후, 문도 제대로 못 열어 탈락을 한다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시험을 잘 봤냐는 다른 동기들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우리 조의 시험을 맡았던 교관들이 탈락자와 합격자를 발표하기 위해 우리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결과를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교관이 입을 열었다.  


 “이 조의 탈락자는.... 없습니다”


내 두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들어 교관을 쳐다봤다. 없다고? 그럼 나도 합격인 건가? 놀란 내 눈을 마주한 교관이 말을 이어갔다.


 “문이 열리지 않아, 시간을 조금 지체한 교육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두 승객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대피를 끝마쳤습니다. 문이 한 번에 열리지 않는 것 또한 현장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때도 포기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승객의 안전을 위해 애써주길 바랍니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교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참고 있던 환호성이 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어린아이처럼 깡총깡총 뛰어 올랐다. 옆에 있던 동기들도 나를 얼싸 안으며 함께 기뻐해주었다. 웃음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호랑이 교관이 우리를 보며 그제야 환하게 웃어 주었다.


 실패라고 미리 단정 짓고 문 열기를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열어젖혔기에 문 너머의 합격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3년 반 동안, 미국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일을 하다가,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한국에 들어와 휴직기를 갖고 있다. 아직 바이러스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전 세계의 경제는 마비가 되었고 항공업계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한국에 돌아 온 후, 내 인생의 좌표가 보이지 않아 몇 달간 좌절 속에서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열리지 않는 문을 끝까지 열어젖혔던 교육생 시절의 일이 생각났다. 인간의 의지와 다르게 찾아온 재난의 좌절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도 두 번 세 번 열어 봐야 하지 않을까. 이 재난이 훑고 간 후, 기다리고 있을 그 너머의 연속된 삶을 위해 다시 힘을 내 도전해봐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실패의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 지금의 좌절이 미래의 단단한 나를 만들 것이라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오래 묵혀두었던 또 다른 꿈, 작가의 꿈을 있는 힘껏 열어보고자 한다. 두 번, 세 번 열릴 때 까지 실패의 문고리를 틀어쥐고 놓지 않으려한다. 이 문 너머에서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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