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스위스 융프라우 가까이 다가가기
스위스에 간다고 하면 빠지지 않는 융프라우,
나 또한 빼놓지 않았다.
흰 눈이 덮인 한여름의 스위스라니
그리고 케이블카를 타고 스위스의 정상에서 내려다본다니
그 생각에 설레는 아침이었다.
가면 굉장히 추울 거라는 조언과 반드시 목도리와 장갑을 챙겨 가야 한다는 반강제 협박까지 듣고 왔던 터라 옷을 입는 것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왔는데,
그래도 한국에서 미리 이 날을 위해 챙겨 왔던 두꺼운 맨투맨과 경량패딩, 그리고 도톰한 조거 팬츠가 톡톡히 제 몫을 해냈다. (대신에 한여름이라는 상황을 고려하여, 다른 방한용품은 뺐더랬다.)
스위스에선 안 가는 사람이 없다더니 온갖 외국인들로 가득 찬 융프라우
반팔을 입은 사람과, 에베레스트 산 등정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동시에 공존하는 곤돌라 앞
그들 사이에 자신의 옷차림이 꽤나 적절하다고 만족스러워하는 나.
익스프레스를 타기 위해 케이블카에 탑승했는데
눈만 돌리면 TOP OF EUROPE이라고 적혀 있어서 무슨 의민가 하고 봤더니
'기차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었다.
덕분에 이곳이 얼마나 높은 곳인지 계속 의식하며 감탄하게 되는 맛이 있었다.
고도가 확 높아지는 게 느껴지는데도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나아가서 세계적인 관광지에 맞춘 인프라도 제대로 체감했고, 무엇보다도 케이블카 내부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언어로 설명이 이어져서 놀랍기도 했다.
우리 한국어가 아시아계 언어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길래 괜히 뿌듯했는데 그만큼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이겠지만 아무렴 좋아.
통로를 지나지나 얼음들로 가득 찬 얼음궁전도 지나서
모르는 외국 할머니와 함께 미끌거리는 모션을 취하며 깔깔깔 거리며 그렇게 목표지점까지 도착했다.
다른 볼거리가 많진 않았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꼭대기, 정상까지 가기 위해 앞만 보고 가는 느낌이었고
거기서 좀 눈에 띄는 것은, 썰매와 스키를 가지고 온 관광객들.
눈을 보지도 못하는 부산인으로서 썰매와 스키라는 건 굉장한 마음을 품어야만 접할 수 있는 그런 것인데
여기서는 무려 스위스 설산에서 체험할 수 있으니, 레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선 정말 퍼펙트한 여행 일정이 되겠다 싶었다. 인터라켄 튠 호수에서 카약을 타고 오고 나선 액티비티에 괜히 더 관심이 가게 되는 것도 있었고.
사실 다른 볼거리가 많았을 수도 있는데, 얼음궁전은 생각보다 너무 춥고 미끄러워서, 여기를 빨리 지나가야겠다는 생존적 본능이 더 앞섰던 것 같다.
정상에 도착했다.
하얀 눈이 쌓여 있고, 아주 눈부신 햇빛이 직통으로 내리쬐는 곳으로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인 겨울 왕국일 거라 생각했는데, 한여름의 스위스라서 그런지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여름날, 한 두어 시간을 이동해서 올라왔을 뿐인데, 이렇게 뽀득뽀득한 눈을 밟아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가.
더군다나 멀리서 찍었던 산을 몇만 배 줌을 해서 눈앞에 갖다 놓은 느낌에 더 여기저기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나는 지금 알프스에 와 있는 거야!!' 이거지!
사진을 찍으며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긴 줄이 있었다.
아 저 앞에 그 큼지막한 스위스 국기가 있겠다.
빼놓을 수 없는 포토스팟.
사실은 기다리는 것을 잘 못해서, 중간에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모두가 이곳을 힘들게 기다렸기 때문에 사진도 오래 찍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 괜히 그 긴 줄에 동참하지 않고 싶다는 반항적인 심리도 살짝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막상 예쁜 사진이 나오면 '역시 찍길 잘했어'하고 흐뭇해할 미래의 나를 위해 좀 기다려보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남편과 셀카도 찍고, 줄이 줄어드는 걸 보며 어떤 포즈를 취할까 다른 사람들을 곁눈질하면서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게 그 '굳이' '굳이' 기다린 일의 보람, 낭만이 되어주었다.
기다리며 풍경을 더 눈으로 담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마음에 드는 사진과도 상관없이, 그 시간 자체가 의미 있는 시간으로 기억에 남아서 좋았다.
카메라 앞에 딱 섰는데 뒤에 줄 선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거다.
한국 사람들은 관광지 앞에서 좀 의도적으로 모른 척해주는 그런 게 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면서도 다시 앞을 보니 다들 한마음으로 좀 응원하는 느낌에 더 가까워서 그것도 참 새로웠다.
내 포즈를 보며 따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스위스 국기가 예쁘게 휘날리길 바라며 오오오 하며 함께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부담을 느끼기보단 나 자신도 모르게 자신감 넘치는 적극적인 포즈를 더 많이 취하게 됐는데, 아무래도 그들 덕분에 더 재미있게 생동감 있게 찍힐 수 있었던 것 같다.
한참을 논 후 내려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휴게소에서 전부 한국인들이 신라면을 먹고 있었다.
아쉽게도 나는 한강 라면이 걸려서 그 맛이 그리 신통치 않았는데
또 생각보다 그리 춥지 않아서 더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이 좀 시들한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곳에서 신라면이라니!
맛있게 조리된 남편의 신라면을 흘깃대며 따끈하고 매콤한 한국의 맛으로 차가워진 몸을 달랬다.
바깥 풍경과 함께 인증샷을 찍고 싶었는데, 한쪽 벽면에 모든 사람들이 피사의 사탑에서 마냥 똑같은 사진을 찍고 있길래, 우리는 여기서 후닥닥 식사부터 해결하기로. 일단 금강산도 식후경, 융프라우도 식후경!
뭘 한 것도 없는데 돌아가는 아이거에선 기절을 하고야 말았다.
아침 일찍 움직인 데다가 나름대로 급변하는 기온에 적응하다 보니, 피곤함이 확 몰려왔는가 보다.
내겐 사라진 기억이었지만, 웃기게 잠든 나를 찍어준 남편 덕분에(!) 그 모습도 기록으로 남았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이다음부터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낮잠을 자버리고 말았는데
잠에서 깬 순간,
일어나서 보는 창문밖 풍경이 너무 믿을 수 없어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잠에서 깨서 마주한 현실의 첫 장면이 이럴 수가 있나?
단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주 다디단 풍경까지 온몸으로 받아버리니, 이것이 하이라이트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산을 가까이 보고 와서일까, 마음의 거리도 더욱 좁혀진 느낌이었다.
남들 많이 간다는 곳을 가서, 굳이 굳이 사진도 남기고 온 그 오전의 일과도 꽤 즐거웠다.
가지 않고선, 나만의 평을 남길 수는 없으니까 이곳저곳 내 취향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도 좋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융프라우는 어땠어? 사실 볼 건 별로 없다던데, 시간만 많이 잡아먹고.
라고 많이들 물어봐서, 대답을 어찌할까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정말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을.
기대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새로움을 느끼게 되고, 평상시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느끼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게 되는 것이 여행인 것은 분명한 건지, 이 날의 융프라우는 나에게 그런 새로움을 많이 경험하게 해 주고, 내 감성의 범위를 조금은 더 넓게 넓혀준 여행지가 아니었나 싶다.
누군가에겐 어떨지, 절대적인 기준으로는 말할 순 없겠지만
나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