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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랑 Feb 21. 2019

피할 수 없는 고통



사표를 썼다. 이유는 많았다. 몸이 부쩍 자주 아팠고, 별것도 아닌 일에 무너지곤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대화 중 길을 잃었다. 말을 더듬는 일도 잦아졌다. 머릿속에서 분명했던 단어들은 안개에 묶여 끝내 소리가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혼자 있는 주말이면 온종일 잠만 잤다. 어떤 날은 깨어 있는 시간이 4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이상하게 자도 자도 자꾸만 잠이 오는 날들이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딱히 힘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정받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행복하지 않았고, 자주, 쉽게 화가 났다. 그리고 대부분은 무기력했다. 생각하니 억울했다. 출세하고 싶은 욕심은 애초에 없었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좋은 사람들과 하고 싶다는 소소한 행복을 꿈꾸며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 지경이 된 걸까, 이해가 안 됐다.



무엇보다 나를 잃은 것 같았다.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모난 구석이 많은 성격이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것만큼은 내 마음에도 꼭 들었었다. 긍정. 학창시절부터 친구들에게 받은 롤링 페이퍼에도 종종 등장하곤 했던 단어였다. 그런데 회사에 다니고부터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됐다. 누구를 만나도 부정적인 소리만 나왔다. 듣는 사람에게도 분명 달갑지 않았을 그 말들은 내게도 꼭 그랬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만난 친구들인데, 집에 돌아오면 그들을 향해 내뱉었던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또 스트레스가 됐다. 화가 났고, 슬펐다.



휴식이 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그때 산티아고 길이 떠올랐다. 언젠가 버킷리스트에 담아둔 일이었다. 막연하게 죽기 전에 한 번은 그 길을 걸어야지, 생각하곤 했었다. ‘언제, 누구와, 어떻게’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답게 게으른 버킷리스트였지만, 본분은 다 하는 리스트였다. 불현듯 자기 차례가 다가왔다 싶을 때마다 잊지 않고 꼭 떠올랐다.



한 번 산티아고 길을 생각하자 당장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산티아고 길은 한 달이라는 시간을 양보 없이 할애해야 하는 길이니, 회사생활을 계속하는 한 가기 쉽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체력을 생각해서라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가는 게 낫지 않은가. 또 마침 혼자 있고 싶었고, 그 길을 걸으면서 미래에 대해서도 차차 생각해보면 될 것 같았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렇게 사표를 쓰고 산티아고 길로 향했다.


산티아고 길은 스페인에 위치한 순례길로, 포르투갈, 프랑스 등 다양한 출발점에서 시작해 스페인의 북서쪽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종교적으로 박해받던 시절에 야곱의 제자들이 몰래 안치해 놓은 터라, 9세기경에야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이 야곱의 무덤으로 향했고, 천 년이 넘도록 순례자의 상징인 조개껍질을 지니고 걷는 여정이 계속되면서 지금의 순례길이 생겼다. 다양한 갈래의 순례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길.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총 800km에 달한다.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다.


나에게는 800km나 되는 길을 순수한 종교적 목적으로 걸을 만큼 신실한 종교가 없다. 아니, 신실하지 않은 종교도 없다. 그래서 개인적인 목적이 전부였다. 20대 후반이 되도록 아직도 잘 모르겠는 나를 알아보고 싶었다. 한계에 부딪힌 나를 마주하고, 나와 대화하고 싶었다. 매일을 앞으로 걸어 나가기만 하는 길. 그 외의 다른 일을 의무로 삼지 않는 길에서 ‘누군가의 누구’가 아닌 그저 나로서 존재하고 싶었다. 현실에 발붙이지 않은 다른 차원의 나를 불러오고 싶었다. 산티아고 길에서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전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고고하고 이상적인 생각들을 가득 채우고 걸을 줄 알았던 내가 걷는 내내 한 생각은 ‘발 아프다, 죽겠다.’가 전부였다. 그 외의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발에 작은 물집이 생겼는데, 걸을 때마다 발밑에 있는 작은 돌멩이가 그 물집을 콕콕 찔렀다. ‘어떻게 하면 저 돌멩이들을 최대한 피해서 걸을 수 있을까’ 하며 발에 하중을 다르게 실어 보는 것이 걷는 내내 내가 한 전부였다. 그런데도 물집은 점점 커져 어느덧 발의 반을 점령했고, 정신은 점점 더 고통에 지배당했다. 무더위를 참아내고 한숨을 돌리는 듯 한적한 9월의 스페인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연이 살며시 속삭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통제 없이는 걸을 수도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고통에서 생각을 돌려보려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산티아고 길에 오게 됐어요?”


“10년을 넘게 만난 여자친구랑 헤어졌어요. 약혼한 사이였는데 다른 남자가 생겼다면서 떠났어요. 그 뒤로 일 년을 멍하게 지냈죠. 그러다 친구가 이러고 있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고, 산티아고 길이라도 걸어보라고 해서, 그래서 왔어요”


“저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삶이 너무 힘들어서 여러 차례 자살 시도를 했었어요. 올해도 새해를 병원에서 맞았는데,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전 취업 준비생인데 취업도 힘들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왔어요.”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최대한 별거 아니라는 듯 숨 고르며 말하는 목소리와 표정에서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짐작됐다. 다들 무거운 무게를 짊어지고 걷고 있구나, 생각하니 안 그래도 무겁던 가방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그럼 저들은 걸으면서도 두고 온 현실에 매여 있을까? 찾고자 했던 답을 찾았을까?


“그럼 지금은 무슨 생각 하면서 걷고 있어요?”


“아무 생각 안 해요. 그냥 힘들다, 무릎 아프다, 뭐 이런 생각뿐이에요.”


“저도요. 언제쯤 산티아고에 도착할까, 아직도 3주나 남았네, 하는 생각만 하고 있어요.”


“다 똑같네요. 저도 발이 너무 아파서 지금 신고 있는 이 신발을 버리고 차라리 슬리퍼를 신고 걷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래도 등산화가 나을까, 하는 고민만 계속하고 있었어요.”



웃음이 나왔다. 인간이란 얼마나 재미있는 존재인가. 단 한 달간 이라도 자신이 처한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페인까지 도망쳐 와서도 또 발밑에 있는 고통에 집중하는 존재라니. 연인과의 이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지독한 상실감, 존재의 증명을 요구받는 청춘의 무게감 등을 짊어지고 이 길로 향한 사람들이 정작 순례길을 걸으면서 하는 생각이 삶에 대한 고찰, 자아 탐색 등이 아니라 이 길이 선사한 새로운 고통뿐이라는 게 웃겼다. 인간이란 현실을, 상황을 바꿔도 또다시 집요하게 새롭게 고통받을 만한 현실을 찾아내고야 마는 존재인 것 같았다. 그러니 인간에게 삶은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해도 결국 고통뿐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안도감이 밀려왔다. 삶이 고통을 줄 때마다 내심 나를 자책하고, 세상을 원망했던 지난날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바꿔보려 노력하고, 그러다 힘에 부쳐 했던 날들….


삶의 고통에서 도망치듯 떠난 내게 산티아고 길은 다시 고통으로 답했다.


이 길에서도 결국 넌 고통뿐이지 않냐고. 모든 건 현실의,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네 마음의 문제라고. 그러니 반대로 그 어떤 현실도 네가 허락하지 않는 한 너에게서 행복을 앗아갈 수 없다고, 행복은 온전히 네 몫이라고.



행복이 왈칵 품 안으로 들어와 나는 어느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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