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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밥 Aug 25. 2023

당신은 포지셔닝이 있습니까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끝내고 학교도 돌아간 것처럼 개학과 동시에 나도 학교에서의 학부모회 임원으로서 활동도 시작되었다. 첫 회의를 앞두고 회의 안건을 훑어봤다. 별문제 없이 따로 준비할 사항은 없어 보였다. 그러다 감사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학교에서는 학부모회 활동 중 학부모 동아리를 4개 운영 중인데 내가 동아리 계획서부터 일정 등을 맡아 관리하는 역할이다. 2학기에는 특이사항 없이 정해진 날짜에 돌아가기만 하면 되어서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사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부회장님, 2학기 동아리 계획서 혹시 변경 사항 있을지도 모르는데 받아두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마디는 '그걸 왜 감사님이 나한테 물어요?'였다. 담당은 나고 계획서를 새로 받아야 하는 거라면 내가 동아리장들에게 알리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학부모회장과도 나눈 이야기가 없었으며 내 입장에서는 일을 전달받는 기분이 들어서 별로였다.

"어? 계획이 변경된 곳이 있다고 하던가? 들은 얘기가 없어서 난 잘 모르겠는데."라고 답했지만 상대방에게 나의 예민함이 전달됐나 보다.

"아, 그게 아니라 변경되었으면 계획서 미리 받아두라고 회장님이 그랬던 거 같은데 부회장님이 담당이시니까 혹시 받으신 건지, 연락받은 게 있는지 그냥 물어본 거예요."

그냥 물어본 거라니. 그냥 물어본 거라고 하기엔 선 넘은 거 같은데 아닌가?


<책으로 비즈니스>란 책에서

2001년 당시 아마존은 급진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포지셔닝 문장을 사용했다고 했다.


[인터넷 사용자] 중 [책을 좋아하는 고객]을 위해 [아마존닷컴]을 만들었다. 이 서점은 110만 권 이상의 책에 접근할 수 있으며 [기존의 소매 서점]과 달리 탁월한 [편의성과 저렴한 가격 및 다양한 선택의 조합]을 제공할 것이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포지셔닝 문장을 사용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잘 이해하는지, 말하는 당신의 마음도 편한지 살펴보세요. 사람들이 당신의 포지셔닝 문장에 만족한다면 그대로 사용하세요. 다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조금 더 부드럽고 편안한 문장으로 표현해도 좋습니다. p71

나와 감사님 사이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책의 포지셔닝에 빗대어 보는 게 적절한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감사님의 말을 듣고 반응했던 나의 예민함을 감지한 상대방은 내 말을 잘 이해했는지, 나도 그의 말을 잘 이해하려고 했었는지 생각하게 했다.


내입장만 고려해 상대방이 선 넘은 발언으로 기분을 망쳤다고만 생각했었다. 통화를 마치고 이틀 후에 회의를 위해 만났는데 그때까지도 어색한 감정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로 안 맞는 사람이구나 그냥 잊어버리려고 했다.


회의에서 각자 역할이 또 한 번 주어졌다. 9월에 있을 프로젝트를 위해 나는 동아리장들에게 협조 요청을 구해야 하고 감사님은 동아리 회원들 출석부 점검과 일정 재확인이었다. 마지막 일정 전에 동아리 활동 시 방문하여 계획대로 잘 운영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일이다. 그 일로 아마 감사님은 동아리장들과 전화로 확인을 한 것 같고 나는 아직이었다.

역시 감사님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그도 나와 계획서 받는 문제로 통화했던 날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뜬금없이 그날의 얘기를 꺼내면서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다. 자기가 말주변이 없어서 정확한 단어 표현을 못해서 나한테 전달이 잘 안 된 것 같은데 일정이 바뀐 것에 대해 미리 계획서를 내야 하는 것을 동아리장들한테 알리고 받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내 입장을 변명하면 더 흥분할 상태가 될 것 같아서 "그랬구나" 짧게 한 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이 상황에서 내 포지셔닝은 없었다. 상대방이 나의 말을 잘 이해하도록 편안한 언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서로의 관점을 파악하고 명료하게 내 입장을 뒷밧침하는 말을 했더라면 앞으로 계속 만나게 될 사람인데 굳이 불편한 감정선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나는 감사님을 위해 학부모회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비즈니스에만 포지셔닝이 필요하게 아니라 생활에도 포지셔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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