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페이에서 홍콩으로
‘홍콩-타이페이’ 노선은 국제선 기준으로 매년 ‘전 세계에서 가장 승객수 많은’ 비행 노선 1위를 차지한다. 대만 타오위안 국제공항에서 거의 매시간 간격으로 출발하는 홍콩행 비행기에 탑승해 이륙 후 제공되는 조촐한 기내식을 다 먹어갈 때면, 캐빈 크루에게 착륙 30분 전을 알리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며 새삼 한 시간 반의 짧은 비행 거리를 체감하게 된다. (코로나 전에는 기내식으로 빵을 줬었는데, 이제는 그래도 밥을 준다.)
대학 시절 매년 홍콩을 방문했었고 그 후 짧게 거주한 경험도 있어 원래 이 도시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우연히 같은 중화권인 대만에 살게 되면서 지리적으로 더 가까워졌음은 물론, 만다린을 구사할 수 있게 되면서 홍콩의 로컬 문화가 한층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전 세계에서 (우리가 학창 시절에 열심히 배웠던) 번자체 한자인 Traditional Chinese를 쓰는 곳은 딱 세 곳, 대만, 홍콩, 마카오뿐이기에 이제는 홍콩의 길거리 한자들도 눈에 더 잘 들어오고, 공용어는 광둥어지만 대다수의 홍콩 사람들이 만다린을 구사할 수 있기에 영어가 아닌 만다린으로의 의사소통이 옵션으로 가능하다는 점도 나의 홍콩여행을 더 흥미롭게 해 준다.(실제로 홍콩의 길거리에서도 광둥어만큼 빈번하게 들리는 것이 만다린이며, 개인적으로 중년 이상의 홍콩분들에게는 영어보다 만다린으로의 대화가 더 원활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홍콩과 타이페이는 일 년 중 날씨가 거의 비슷하다. 습하고 무더운 여름이 5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이어지고, 겨울에는 쨍하게 파란 하늘을 보기가 힘들기에 11월은 두 도시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가벼운 카디건 하나 툭 걸치고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을 만끽할 수 있는 지금, 갓 다녀온 따끈한 홍콩 여행 첫 번째 이야기는 ‘홍콩의 오래된 맛집’이다.
Kam’s Roast Goose
주소: No.226, Hennessy Rd, Wan Chai, Hong Kong
영업시간: 매일 11:30 AM–9:30 PM
홍콩의 거리가 막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오후 5시 반, 광둥식 바비큐로 유명한 Kam’s Roast Goose를 찾았다. 얼마 전까지도 타이페이 101 지하에 이 집이 있었는데 이제는 폐업을 해버려 아쉬움이 남았던 터. 본토인 홍콩에서 먹는 맛은 어떻게 다를지 한껏 기대를 안고 도착해 번호표를 받으니 내 앞에 대략 30팀, 명수로 따지면 100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이미 가게 주변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내부 좌석이 단 30석이라는 사실을 보아 꼬박 한 시간 정도의 웨이팅은 감수해야 할 듯하다.
완차이(Wan Chai) 대로변에 위치한 Kam’s Roast Goose는 3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작은 식당이다. 총성 없는 전쟁터와 같이 치열한 홍콩 요식업계에서 70여 년을 살아남았고,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권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해 있는 이곳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오래된 맛집이다. 대만 타이페이에서도 로컬들 사이에 중식의 꽃은 광둥식으로 꼽히는데, 그중 광둥식 바비큐는 인기에 비해 제대로 하는 집이 귀한 것을 보면 만들기에 꽤나 까다로운 음식임에 틀림없다.
예상대로 약 한 시간의 기다림 끝에 착석을 할 수 있었다. 기다리는 인파들을 상대로 힘찬 목소리로 교통정리를 딱딱해주시던 식당 직원분이 대뜸 합석해도 괜찮냐고 물으시길래, 흔쾌히 OK사인을 날렸다. 합석은 홍콩 로컬 식당에서는 너무나 흔한 문화니까. 그런데 안내된 테이블은 작디작은 2인용에 서로 마주 앉아 얼굴을 맞대고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 대여섯 명이 둘러앉는 원탁에서의 합석은 여러 번 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똑같이 뻘쭘한 표정을 한 비슷한 연배의 호주 남자가 다가와 내 앞에 앉는다. 10초간의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내가 먼저 용기를 내어(!) 대화를 시작해 본다.
“나 홍콩에서 합석은 여러 번 해봤는데 이렇게 2인용 테이블에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앉아 먹는 건 처음이야!”
서로 멋쩍은 웃음이 터지고 홍콩을 매개로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하니 음식이 바로 서빙된다. 호주 금융권에서 일하는 Nick은 오늘 밤 비행기를 앞두고 공항에 가기 전 빠듯하게 이곳에 들를 정도로 아시아 음식을 좋아하는 foodie이다. (사실 홍콩식 바비큐는 홍콩향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한국 사람들도 많기에, 서양인으로 혼자 이곳을 찾아 야무지게 즐기는 그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나도 호주사람을 만나 깊게 대화해 본 것은 처음이라 이것저것 궁금했던 점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일본 라면부터 Nick이 어제 갔다 왔다던 홍콩 Mott 32까지 아시안 음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처음에 어색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잊고, 우리 앞에 놓인 이 미슐랭 원스타 음식에 집중할 새도 없이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내가 이날 시킨 건 차슈(Char siu), 즉 돼지고기 바비큐였는데 꿀을 바른 듯 반지르르한 빛깔이 입맛을 한껏 돋우는 비주얼이었다. 적당히 비계가 들어간 쫄깃 촉촉한 차슈 한 점을 흰쌀밥 위에 얹어 먹으면서 Nick과 나는 연신 “맛있다!”를 연발했다. 차슈 특유의 달큰 짭짤한 단짠의 조화가 지루할 쯤에는 광둥식 야채요리 Gai lan(Chinese Broccoli)을 곁들이면 좋은데, 딱 알맞게 아삭하게 삶아진 Gai lan은 기름진 광둥 음식과 최고의 궁합을 자랑한다. 차슈, 흰 밥, 야채까지 해서 총 한화 3만 원(HKD 195)의 아름다운 계산서를 받아 드니 더욱이 왜 그 오랜 세월 홍콩사람들에게 이 가게가 사랑받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Mak’s Noodle
주소: 77 Wellington St, Central, Hong Kong
영업시간: 매일 11 AM–9 PM
오후 2시, 완탕면을 먹기 위해 느지막이 센트럴 소호를 찾았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골목골목 힙한 레스토랑과 상점들이 포진해 있는 소호 지역의 가파른 경사길을 올라가다 보면 눈에 띄는 쨍한 초록색 간판이 오늘의 목적지 Mak’s noodle이다. 점심시간에는 긴 웨이팅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어중간한 시간에 온 덕에 기다림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홍콩에서 처음 유래된 음식은 아니지만 홍콩 덕분에 모두가 알고있는 완탕면은 이 도시의 소울푸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밥그릇 사이즈 정도의 작은 그릇에 담겨 나오는 완탕면은 살이 통통한 새우/돼지고기 완탕과 꼬들한 에그 누들, 그리고 감칠맛 나는 국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음식이다. 전통적인 완탕면은 양이 작아 몇 젓가락이면 없어지는 ‘간식’ 개념이기에 가게에 앉아 있다 보면 늦은 오후 잠시 들러 한 그릇 후루룩 먹고 자리를 뜨는 홍콩사람들도 간간이 보인다.
1960년대에 문을 열어 역시 3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Mak’s noodle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소호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좋고, 바로 앞 대각선에는 또 다른 유명 완탕면집 Tsim Chai Kee가 자리해 배만 허락한다면 두 집을 연달아 먹고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Tsim Chai Kee보다는 Mak’s noodle의 손을 들어주겠는데, 완탕면이야 두 집 모두 맛있지만 사이드로 시킨 Mak’s noodle의 야채 요리가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Tsim Chai Kee의 Gai lan은 그날만 그랬는지 너무 삶아 물렁거릴 정도였다.) 코로나 이후 가격이 또 올라 지금은 기본 완탕 한 그릇에 한화 8천 원(HKD 48), 야채요리가 6,600원(HKD 40) 정도 하지만, 홍콩의 물가를 생각해 보면 여전히 비교적 저렴하고 간편하게 홍콩인들의 한 끼를 책임지는 소울푸드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글, 사진 ⓒdream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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