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에서 우리만의 공간이 있는 주택으로
플랫에서 우리만의 공간이 있는 주택으로
3층짜리 플랫(영국의 아파트 식 주거 형태)의 3층 꼭대기에 얻은 우리의 첫 집은 우리 네 식구가 살기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몇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첫 째로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 두 번째, 창문의 열 수 있는 부분이 작아 환기가 잘 안 된다는 것, 세 번째, 전기로 난방을 하는데 충분히 따뜻하지 않고 전기요금은 많이 나온다는 것, 다섯 번째, 주방에서 마주보이는 바로 앞집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이웃의 사생활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것, 그리고 방음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이 있었다. 영국은 6개월 단위로도 계약이 가능해서 처음 계약할 때 첫 6개월을 살아보고 연장을 할지 이사를 할지 결정하기로 했던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우리가 집을 계약하는데 고려했던 것은 집의 구조나 환경보다 곧 큰 아이가 가게 될 학교와 가까운 곳을 우선순위로 생각했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영어도 통하지 않는데 낯선 곳에서 학교를 가야하는 큰 아이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영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맨체스터에 남편이 하는 프로그램으로 1년 먼저 가 있던 다른 한국인 가정을 알게 되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가정의 두 딸, 지수와 지민이는 우리 아이들보다 꼭 한 살씩 많은 아이들이었다. 내 스스로는 과거 수년간 몇 몇 다른 나라에서 해외 생활을 할 때에도 한국인보다는 현지인과 더 가깝게 지내는 편이었으나 아직 한참 어린 아이들이 낯선 곳에서 적응하려면 아무래도 주위에 한국인 또래가 있는 것이 낫겠다 싶어 이번에도 처음 도착해서 묵을 숙소로 한인 민박집을 선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예외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즉, 한국인 가정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이 또래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우리 아들을 보내기 위해 부동산에 반드시 그 학교 주변의 집만 계약하겠다고 고집을 했다. 그리고 계약하게 된 집이 바로 이 집이었다. 아이가 다니게 될 초등학교에서 도보로 약 10분 정도 떨어진 곳. 마침 집이 비어 있어서 바로 입주가 가능했던 곳이다. 우리에게는 집의 위치만 중요할 뿐, 그 외의 것은 크게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몇 개월 살다보니 이런저런 불편한 점이 느껴진다. 특히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짜리 플랫은 장을 보고 올 때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남편과 내 손 가득 짐을 가지고 몇 번씩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20kg 짜리 쌀이나 배추 한 박스를 들고 올라가야하거나 아이들이 차에서 잠이 들어서 안고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계단을 하나하나 오를 때 마다 숨이 차올랐다. 집 구조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편이었으나 설계한 사람이 모양만을 생각했는지 창문 자체는 커다란 유리로 되어 방마다 채광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창문을 열 수 있는 공간은 너무나도 작아서 작은 숨구멍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우리가 입주했을 때는 6월 한여름이었으므로 난방을 틀지 않아서 몰랐는데 10월이 지나고 11월이 지나며 점점 추워지자 아무리 난방을 틀어도 따듯하지가 않았고 전기요금은 전기요금대로 몇 배로 청구되었다. 원래 아이들 때문에 카펫 바닥의 집 보다는 마룻바닥 집을 선호했었는데 겨울을 겪어보니 청결보다는 따뜻함이 더 절실했다. 온돌 난방이 되지 않는 영국의 마룻바닥 집은 실내화를 신어도 바닥의 냉기가 그대로 전해지고 춥기만 했다.
게다가 주방에서 바라보이는 앞집과의 거리는 왜 이렇게 가까운지, 어떨 때는 서로가 민망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블라인드를 치고 있자니 답답하여 서로가 코 앞에 마주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냥 블라인드를 치지 않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주방으로 간 내가 기겁을 했던 것은 앞집 여자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그냥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불편하더라도 내 쪽에서 블라인드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방음이 문제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제일 꼭대기 층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가해자였다. 같은 층에 살던 피터와 아랍계 커플과는 마주치면 인사도 하고 서로 가끔 안부도 전하고 서로 서로 택배도 보관 해 주는 나쁘지 않은 사이였지만, 아래층이 문제였다. 만 2살, 4살짜리 사내아이들이 어찌나 집에서 쿵쿵대고 뛰어다니는지, 아랫집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었으나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은 아이들이 너무 시끄러워 주의를 주었음에도 또 다시 금세 쿵쿵거리자 갑자기 아랫집에서 우리 집을 향해 더욱 크게 쿵 하고 뭔가를 치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겁을 먹고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뛰어도 뛰어도 에너지가 솟아나는 꼬마들을 통제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다음 날, 우리 집 우편함에 성난 글씨로 쓴 편지가 하나 꽂혀있었다. 아이들이 있어서 이해는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음에도 그러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그 편지를 받은 날, 우리는 이사를 결심했다. 이웃집과의 관계 때문에 한창 뛰놀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자유를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단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자라기를 원할 뿐이었고, 이렇게 이웃과 서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아이들을 꾸중할 이유가 아닌데도 꾸중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아이들에게 스트레스 없이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으로 우리가 이사를 하자는 결론이었다.
마침 6개월 계약 기간이 끝나기 2주 전이었고, 우리는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주택을 계약하였다. 새 집은 큰 아이 학교에서는 꽤 거리가 있어서 걸어다닐 수는 없고 차로 10분 정도 소요되지만 정원과 전실이 딸린 2층짜리 아담한 전형적인 영국식 주택이었다. 바닥은 마룻바닥이 아닌 카펫이었지만, 이전 세입자가 나간 뒤 집 주인이 카펫 및 페인트를 새로 해서 내부는 깨끗했다. 무엇보다 처음 우리를 도와주셨던 한인 민박집과는 겨우 두 블록 떨어진 거리라 의지도 되었다.
이사하는 날. 첫 집도, 이사할 집도 모두 침대, 옷장, 냉장고, 세탁기, 소파 등 기본적인 가구가 구비 된 집이라 큰 짐은 옮길 것이 없겠다 생각했는데도 그 사이 몇 달 살았다고 짐을 싸고 보니 생각보다 꽤 많았다. 다행히 우리가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많은 도움을 주셨던 다른 한국인 부부께서 하루 종일 이사를 도와주셨고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이사는 계속되었다. 한국의 포장이사와 자장면이 무척이나 그리운 날이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터전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며 이제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며 기쁜 마음으로 이삿짐을 정리했다.
이 동네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큰 아이의 학교 때문이었다. 이사를 한 시점이 큰 아이가 학교를 다닌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인데 이 때 까지만 해도 큰 아이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힘들어 교우 관계가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그 때 새로 알게 된 한국인이 계셨는데 남편이 캐나다인이고 혼혈인 두 아들 중 막내가 우리 아이랑 동갑이었다. 영국에는 우리보다 1년 일찍 정착하셨으나 그 전에는 한국에서 계속 살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잘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글에 홀로 떨어져 살아남아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의, 반에 동양인이 아무도 없는 지금의 학교보다는 혼혈이지만 한국어도 잘 하고 나이도 동갑인 동성 친구가 있는 학교로 아이를 전학시키고 싶었다. 그러면 현우에게도 조금이나마 더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며 마음의 답답함이 조금은 사그라들지 않을까 하는 바램이 있었다. 마침 그 학교가 새로 이사 간 집 바로 담장 옆이라 아무리 천천히 가도 2~3분이면 도착할 거리였고, 집을 이사하고 바로 학교 전학 신청을 해 놓았다. 학교 측에서는 대기가 길어 자리가 나면 연락을 주겠다고 답변을 주었다.
by dreaming m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