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편이 답답해진다. 마치 꿈을 접어두라는 압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현실'을 냉혹하고 어려운 상황의 대명사로 여기게 되었다. 눈앞에 닥친 버거운 조건들, 극복해야 할 장벽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면서 말이다. 반면 '이상'은 비현실적이고 당장 쓸모없는 공상 정도로 치부된다.
최근에 누군가와 이야기하다가 “일할 때 이상적인 것을 쫓기보다는 현실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 의문이 떠올랐다. 우리가 현실과 이상을 마치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증에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을 때 현실을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상태'라고 정의하고, 그 반대말을 '이상'이라고 못 박아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까?
사실 '현실'이라는 단어 자체는 매우 중립적이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니까 좋고 나쁨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에 '어렵고 무서운 것'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벗어나야 할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 융합'이 바로 이런 현상이다. 수용전념치료(ACT)에서는 우리가 사건 자체보다 그것을 해석하는 언어와 의미의 틀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현실은 힘들어"라는 생각에 매몰되는 순간, 우리는 정말로 현실을 힘든 것으로만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에서 어디로 벗어나고 싶은 걸까? 결국 '이상'적인 상태가 되기 위해서 아닌가. 이상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북극성처럼 우리를 이끄는 좌표이자 도달하고 싶어 하는 궁극의 모습이다.
나는 현실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이상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당면한 조건으로 구성된 상황'**이라고. 다시 말해, 현실은 우리가 바라는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지금 이 순간에 마주하고 있는 장면들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극한의 현실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인간은 그 현실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한 열망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이상이고, 우리는 그 이상을 향해 오늘이라는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을 내려놓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현실 안에 매몰되어 반복되는 쳇바퀴에서 무기력감을 느끼게 된다. 매일 같은 일상, 같은 고민, 같은 패턴의 반복.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찾아온다.
또는 현실을 극복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현실도피적인 곳으로 향하게 될 수도 있다. 방향성을 잃은 현실 극복은 결국 또 다른 막다른 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해결을 논의할 때 단순히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라고 말하는 대신, "당면한 상황에서 이상적 상황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의 조건과 자원 속에서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긍정주의가 아니다. 어려운 상황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자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지금 여기의 삶을 더욱 의식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내기 위한 관점의 전환이다.
우리는 늘 이상을 쫓고 있다. 이상을 쫓고 있는 매 순간순간이 바로 현실이다. 현실에서 경험하는 상황과 조건이 이상에 이르지 못하기에 우리는 이상을 향해 내일의 현실을 살게 될 것이다.
즉, 현실은 지금 경험하는 이상을 향한 여정인 것이다. 현실은 이상이 실현되어 가는 살아있는 과정이며, 이상은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방향성과 동기다. 현실은 이상 없이 존재하지 않고, 이상은 현실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이상을 포기하지 말자. 현실이 누적되어 이상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래야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음에 누군가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라고 말할 때, 이렇게 대답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