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라 작가님을 아시나요?

#고사리가방 #북살롱이마고 #설레이다인제주 #쓸쓸했다가귀여웠다가

by 마흔 너머

책의 취향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책을 특별히 가리거나 하진 않는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나는 '책'(명사)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행위'(동사)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편식하듯 책을 가리지는 않지만 읽다 보면 그래도 취향이라는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자기계발서보다는 소설을 더 좋아한다. 인문서적이 과학서적보다 재미있다. 어쩌면 책의 주제보다 작가의 글쓰기 방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나 싶다가도, 어떨 때 보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책을 고르고 있는 나를 마주하곤 한다. 이런 무덤덤한 책취향 때문에 나는 어느 장르를 좋아한다거나 어느 작가님의 팬이라는 말을 하고 다니지는 못한다.


그러다 제주에 와 독립서점을 찾고, 북카페에 머물고, 도서관을 다니다 보니 그동안 안 읽어보던 스타일의 책, 나중에 여유 있을 때 읽어야지 미뤄놨던 책, 이름을 들어만 봤던 작가분들의 책을 읽을 기회들이 생겼다. 독립서점이나 북카페에 손글씨로 남겨진 주인장의 메모는 책을 더 읽고 싶게 만들고, 작가를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취향이란 것이 딱히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게도 취향이란 것이 있었구나 깨닫게 되는 몇몇 책들도 발견하곤 했다. "제주에서 제주읽기"라는 내 나름의 프로젝트도 책을 고르는 또 하나의 취향이 되었다. 제주의 봄, 여름, 가을을 거치며 제주를 다양한 관점으로 쓴 책들을 읽어보게 되었고, 그렇게 제주의 여러 계절에 만나게 된 작가님이 생겼다.


#김성라 작가님을 아시나요?


처음 김성라 작가님의 책을 읽은 것은 종달리 북카페에서였다. 제주의 봄, 인상적인 고사리철을 보내고 여름이 다가오던 날이었다. 종달리746에서 읽었던 김성라 작가님의 "고사리 가방"은 한 컷 한 컷 넘기며 "그렇지, 맞아, 그랬어. 하하하" 중얼거리며 잊지 못할 추억을 되새김질하듯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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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때였다. 유채꽃 구경하러 가시리를 몇 차례나 차로 드라이브 갈 때마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하, 허, 호" 번호판(렌터카)이 아닌 번호판의 차들이 들판에 차를 대놓고 사람은 없는 거다. 처음엔 근처 목장이나 밭에 일 나가셨나 보다 했다. 근데 또 길가에 정체 모를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앞치마에 팔토시, 배낭을 멘 사람들. 봄이라 봄나물 캐러 다니시나 보다 했다. 아무 데나 주차된 차는 늘어만 가고, 비슷비슷한 복장의 그분들을 여럿 지나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정체를, 목적을. 알고 보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아이들 눈높이에 더 잘 보이는, 어리지만 꼬부라진 고사리 줄기, 더 잦아진 실종 재난문자, 고사리 실종 위험지역을 알리는 현수막, 남원 한남리 고사리축제에서 장바구니와 함께 받은 호루라기. 고사리 끊는 이 시기의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고 그래서 신기했다. 그리고 매우 중독적이었다.


제주를 여행자로 왔다 갔다 했을 땐 고사리 장마라는 이쁜 말을 몰랐다. 아니 솔직히 4-5월, 유채꽃과 벚꽃이 흐드러진 여행하기 좋은 계절에 제주에 와본 적이 없었다. 올 생각도 못했다. 날 좋은 봄날 주말 비행기는 매진이오, 관광객으로 벅적거린다는데 그런 줄도 몰랐다. 그러던 내가 고사리 끊겠다고 오름 어느 메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줄 과거의 나는 정말 몰랐다. 길을 걸을 때엔 습관적으로 풀 틈사리 어딘가 있을 고사리만 찾고 있었다. 이건 중독이었다. 온 가족이 근 한 달을 그러고 다녔다(그렇게 열심히 수집한 고사리를 끓이고 말리고 보니 마트에서 파는 한 봉지도 안된다는 사실은 아아... 재능의 문제인가).


이 추억이 김성라 작가의 "고사리 가방"에 담겨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행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의 한토막이 책 안에 들어있었다. 작가님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른 책들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귤사람>, <여름의 루돌프>까지 읽고 나니 제주의 가을이 도착했다.


북살롱 이마고에서의 북토크


이건 운명이다. 우연히 알게 되었다. 안 그래도 제주의 가을에 대한 책을 쓸 예정은 없으신지 묻고 싶었는데! 김성라 작가님의 북토크, 그것도 다시 또 가고 싶었던 북살롱 이마고에서! 그런데 북토크가 있는 날은 남편이 육지 가는 일요일이라 아이들을 내가 온전히 보아야 하는 날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도 되는지 문의하였고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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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살롱 이마고 인스타그램에서(@imago_jejuarchive)


북살롱 이마고 제주 아카이브센터는 지난봄에 한번 방문했었다. 아이들 학교 학부모 독서동아리의 첫 모임 장소였다. 진작에 가고 싶은 곳으로 저장해 둔 곳이었는데, 여럿이 가니 또 그것대로 재미있었다. 책 이야기보다 제주살이, 표선살이 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모임이 끝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너무 아쉬워서 곧 와야지 기약했다. 그런데 한 달, 그리고 추가로 더 몇 달 재정비의 기간이란다. 제주는 그랬다. '가야지' 했을 때 바로 가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지 모른다(실제로 나중에 가야지 했던 '책방 무사'와 독립서점 '아베끄'는 머뭇거리던 몇 달 사이 문을 닫아 결국 영영 못 가게 되었다).


북토크를 하던 10월 27일은 비가 왔다. 차로 10분도 안 걸리는 하천리에서 세화리로 넘어가는데 택시가 안 잡혀 발을 동동 굴렀다. 평소엔 카카오택시로도 잘 잡혔는데, 십여분씩 여러 번 기다려도 이 거리를 가려는 택시가 없었다. 표선콜택시를 생각해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한 시간 전부터 나갈 채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제시간에 못 맞출뻔했다.


작가님은 차분한 인상이었다. 한 시간가량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목소리도 상냥했다. 책 속에서처럼 고사리 끊으러, 귤 따러 엄마와 함께 가주는 착한 딸 같은 느낌이었다. 할머니집 바람 잘 통하는 방에 누워 게으름도 부려보고, 할머니 친구들과 버스 정류장에서 함께 루돌프코가 되는 정 많은 딱 그 주인공 같은 인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의 속도였다. 고사리 가방의 작업 여정은 어느 한 시점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보고 그렸던 장면들이 녹여져 있었다. 순간을 흘려버리지 않고, 그 작은 사물과 생명 하나하나를 따뜻하게 보듬어 그림을 그린 느낌을 받았다.


KakaoTalk_20241027_174517909_03.jpg <고사리 가방>의 여정


제주에서의 북토크는 처음이었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제주의 책방에서는 작가를 모시고, 혹은 다른 여러 형태의 북토크, 책모임들이 많은데 아이들이 학교 간 그 짧은 시간을 노려 신청하기란 쉽지 않았다. 내 취향에 따라 온 가족이 북토크에 출동하기엔 소규모 모임이 많아 민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북토크는 럭키비키한 기회였던 것 같다. 한 시간 동안의 작품 이야기가 좋은 것은 물론이고 10대부터 아마도 70대?(전혀 그렇게 보이시지 않았지만!)까지 함께 한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신 한 시간의 (글감) 활동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마지막 보물찾기는 정말 신의 한 수였고. 줄 서서 작가님 사인 받고 사진 찍는 것에 아이들은 행복해했다. 따뜻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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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라작가님께 사인받기!


쓸쓸했다가 귀여웠다가


북토크를 참여해 보니 북토크는 그것이 있었던 한두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전후가 이어지는 긴 활동이었다. '작가 앓이'를 할 수 있는 전후의 짧은 시간. 이것도 마음의 여유가 있으니 가능한 거겠지. 작가님은 부러 제주의 계절을 염두하여 책을 쓴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가을 편이 나올 예정은 없다고 (약간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북토크에서 보여주신 작업 중 한 권이었던 책을 찾아 읽어보기로 했다.


"촘촘히 오로로, 모여들었다", "퐁퐁 생겨났다"

입을 모아 "오"를 발음하면 생기는 귀여운 소리. 다른 책에도 나직한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음성지원되는 듯했는데 <쓸쓸했다가 귀여웠다가>는 더 그랬다.


p63 '오늘도 시작이네'하는 마음으로 교차로에 서서 초록불을 기다리던 출근길이었다. 내 앞을 스쳐가는 버스 안 차창에 얼굴을 밀착하다시피 하고 눈을 반짝이는 외국인에게 눈길이 갔다. "어디서 봤더라...' 그건 언젠가 여행지에서 띄고 있던 내 눈빛이었다. 돌아가더라도 매일 이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여행자의 마음으로 지내야지 했지만 어느새 그곳에서 보았던(이렇게 좋은 곳에서 어떻게 저렇게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거지? 의아했던) 지루하고 심드렁한 현지인의 표정을 하고 있구나.

여행자의 마음, 반짝반짝한 눈. 이 에피소드는 북토크에서 작가님이 보여주었던 그림이었다. 작가님의 심드렁한 표정도 상상이 가지만 여행자의 반짝거리는 눈도 상상이 간다. 보통 책을 읽으면 책의 화자에 '나'를 대입하거나, '나'는 어땠을까 생각하곤 할 텐데 북토크의 후유증인가... 자꾸 작가님이 말을 한다.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p64 바다는 그렇게 하루 중에 잠깐 보아도 좋은 것이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그 존재의 뭉클함과는 좀 다르다, 하루 중 잠깐 보아도 좋다는 그 마음은. 섬에 산다고 매일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 새끼발톱만 한 바다일지라도 잠깐 보는 바다에 소소한 행복이 있는 그 마음은 제주여서 지난 몇 달 내가 느낄 수 있는 그 마음이었다.


p99-100 K는 나에게 "언니, 나는 언니가 귀여운 이야기도 잘하지만 쓸쓸한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어요."라고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다정한 아이가 다정하게 말해주어 쓸쓸한 나를 미워하지 않고 다정히 여기며 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퐁퐁 생겨났다. (중략) 우리는 더 다정하고 더 쓸쓸해질 수 있을까, 둥글게 모여 앉아, 그래,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밤이었다.

북토크에서 만난 김성라작가님은 고요한 분이었다. 쓸쓸했다가 귀여웠다가, 그래서 우리에겐 다정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가. 그림과 글에 이 쓸쓸함과 귀여움이 묻어있는, 한 자 한 자 꼬옥 꼭 정성을 다해 적은 손편지 같은 그런 다정함이 담겨있는 책.


p120 하늘 가까이 끝없이 뻗어 자란 나무도, 그 나무의 끝에 이름이 있다는 것도, 언젠가 높이 올려다보고 나무의 끝에 이름을 붙여준 이가 있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중략)

우듬지라는 말은 제주에서 유독 많이 쓰는 말인가? 이전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던 이 우듬지라는 단어는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에 여러 번 등장하여 따로 찾아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 한남시험림 탐방을 할 때 보았던 키재기 하듯 하늘로 쑥쑥 뻗은 삼나무 숲길. 그 키를 유지하기 위해 제 가지조차 떨궈내어 그 잔재들로 어수선하던 아래. 그렇게 뻗어 올린 그 정점, 우듬지. 이름도 누군가 보듬어 보아야 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따스함이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내 책의 취향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책을 특별히 가리거나 하진 않지만 아끼고 좋아하는 책과 작가는 있다.


좋아함에 열성이 없어 가끔은 나 스스로가 미지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책에 있어서도 무언가에 깊이 빠지는 대신 좋고 싫음 없이 폭넓게 수용한다. 덕질하는 마음을 그동안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내 나름의 덕질법을 깨달았다. "Following a thread". 논문 검색에 대해 강의할 때 논문을 찾는 방법 중 하나로 설명하는 것인데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어떤 논문에서 레퍼런스를 찾아 그 논문을 읽고, 거기에서 또 관련된 논문을 찾아내는 그런 방법으로 설명하곤 했었다. "Following a thread"은 직역하여 실을 쫓는 행위(신화 속에서 미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실타래를 미리 풀어놨다 그 실을 따라갔던 테세우스의 이야기 같은*), 이야기의 맥락을 찾아가거나 작업의 흐름이나 과정을 추적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주제나 아이디어가 확장되고 연결되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 나의 덕질법이었다.


제주의 봄 - 고사리 장마 - 고사리 끊기 - 김성라작가의 고사리 가방 - 김성라작가의 다른 책들 - 그리고 다시 제주... 이렇게 이어지는 나의 덕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또 무엇인가의 꼬리를 물고 다시 시작되겠지.


누군가의 팬이 되고, 덕질을 하는 그 시작엔 무엇인가의 '접촉'이 있지 않을까? 나는 뜨거운 불길 같은 열성으로 좋아함을 끈기 있게 좇지는 못하지만 무언가에 맞닿고 교류하고 나면 거기에서 파생되는 실마리를 좇아 길게 길게 이어간다. 그것이 때론 전혀 다른 출구로 인도하여 나의 시작을 더듬어가기엔 너무 멀리 가버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것이 내가 무언가를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하는 방법인 것 같다. 이걸 이제야 깨달았네.



* 생뚱맞지만 제주에서 이 이야기를 테마로 한 곳이 있다. 메이즈랜드(https://mazeland.co.kr)의 미로퍼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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