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원래 이런 놈 아임다.
언제부터인지 꼰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번씩 든다.
난 원래 꼰대랑은 거리가 먼 아주 젠틀하기 짝이 없고, 배려에는 비교대상이 없었으며, 남부러울 것 없는 대기업의 멀쩡한 부장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꼰대일 수 있겠으나, 정말 그렇지는 않았다.
부장은 40대가 되자마자 달아서 이제 10년이 되었다. 그래, 난 이제 딱 50이다.
매일 여기저기서 불러대던 통에 간은 성할 날이 없었고, 인기 절정을 구가해 가면서 이리저리 일과 술을 병행하던 때가 나의 40대였다.
팀장이 되면서 나의 간은 저 멀리 바다 깊은 곳에 맡겨두고 점점 더 찌들어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켜냈던 나의 신조는 항상 친절하고 배려하며, 일을 할때는 무조건 합리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왔고, 그렇게 계속했었고, 반복된 합리적 결정에 이미 나는 ‘이 시대 최고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자’로 등극하고 있었다.
그게 나의 착각이었는지, 내가 만든 허상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허울뿐인 감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참 잘났다는 말밖엔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내가, 막 50이 되니 제대로 까칠해지는 것 같다.
피부는 운동을 해서 그런지 부드러워지는데, 성격은 조건부 상황기반 배려심만 장착한 채 까칠해 지기 일쑤다.
내가 생각해도 ‘굳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외면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생기고, 그걸 다시 부정하기 위해 꼰대가 되어간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걸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볼빨간 갱년기’ 같기도 하고, 그동안 풀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풀어내는 시기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그걸 받아내 줄 사람들이 생기니 하염없이 토해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아마 요즘의 철학적인 말로 정리해 보면, 기껏 남들을 위해 살아오다가 나를 위해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불만과 후회가 괜한 사람 붙잡고 괴롭히는 것 같다.
여전히 남들이 보기에는 젠틀하고 배려심많지만, 예전의 그 순수했던 배려심보다는 어쩔 수 없는 배려심을 장착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내 위치가 그러니, 말을 조심해야 하는 시기이니,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니 등과 같은 알고리즘에 입각한 배려심의 실행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나를 보기 위해 내면을 들추어내는 것 조차 두려워 힘들어하는 내가, 남들에게는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행동했던 것이었다.
자신을 더 냉정하고 솔직하게 보고, 거짓없는 얼굴로 한 차례 긁어낸 후 제대로 된 인생의 2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생긴다.
평생 그렇게 살다가 가도 내가 나를 모를 수 있게 할 수 있지만, 주변사람들은 나로 인해 괴로움을 삼키며 쓴 웃음을 더 지어야 할 수 있다.
까칠해 지는 나의 50대에 부드러운 화장품이라도 선물해서 30대로 돌아가자.
돈이 들어도 좋으니 이제 ‘좋아 보이는 사람’이 아닌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람이 제대로 되어 보자.
그렇지 않으면, 내면, 외면이 모두 까칠해져 볼성사나워지고,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부담되는 외골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외로운 이유는 이런 걸 자신이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외롭다고 부르짖지만 말고 돌아보고 부드러움을 장착하고 난 뒤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