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진 가족, 만남의 기회
난 2018년에 가족과 함께,
여행과 교육을 겸해 총 3주간 핀란드 헬싱키와 독일 베를린, 체코 프라하를 여행하고 왔다.
5년이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 우리 가족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고, 가족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기에 반드시 글을 통해 그 생생한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매번 글을 남기기 시도를 여러번, 시간과 여유가 없던 차에 새로운 여유가 생겼고,
또한 중요한 시험을 한 차례 치르고 나서야 가족을 위한 글을 남겨본다.
우리 가족의 여정이고 추억이지만, 아마 같은 상상을 하고 있는 가족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막연히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같이 이 추억을 나누고 그 여정을 같이 따라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미천하고 빈약한 글솜씨지만 흔적을 남긴다.
헬싱키를 다녀온 건, 2018년 여름이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고, 다행히 한국을 떠나 유럽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비록 공부를 하러 떠나는 시간이지만,
나에게는 떨어져 있던 가족과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오롯한 시간이었다.
헬싱키로 떠나기 전, 같이 떠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건,
확정되지 않은 교육기간과 아내와 딸의 방학기간을 맞추는 일.
아내와 딸은 학교 이동으로 인해, 통영에 거주하고 있었고,
나는 직장 문제로 창원에서 거주하면서 주말 부부를 하던 시기라 시간은 물론 체력적으로도 다들 힘든 시기였다.
체력과 마음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관계도 소원해졌다.
왠지 모를 서먹함과 서로 간에 느끼는 불만,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멀어지는 마음.
주말부부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다는 동료들의 쓸데없는 얘기들을 해대는 통에,
삼대가 왜 덕을 쌓았나라는 불평 어린 농담도 했고, 일주일 동안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는 통에 체력은 날로 더 지쳐갔다.
주말에는 공부를 위해 매번 창원, 평택과 서울을 오가며 남은 체력까지 다 소모해 버렸고,
다시 통영으로 가거나, 아내가 창원으로 올라오는 번거로움이 말도 못 하게 심신을 지치게 했다.
너무 지쳐 주말에는 거의 서로에게 대화도 시도하기 힘들었고,
조그마한 것에도 쉽게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민감한 시기였다.
나는 나대로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고, 아내는 아내대로 새로운 환경에서 딸만 데리고 무서운 도시의 한곳에 자리를 잡고, 모든걸 생소하게 해낼 수 밖에 없었다.
딸은 새로이 입학한 학교가 낯설고 힘들고 외로우며, 아빠없는 그곳이 많이 무서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엄마와 딸이 저렇게 서로가 죽고 못사는 관계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말도 못하게 싫었고 모든 것에 의욕이 떨어졌다.
이제는 통영을 떠나 서울로, 그리고 모두가 다시 결합을 했고,
우리에게는 통영이 다시 우리의 추억 속에 자리 잡은 영원한 추억 찾기 여행지가 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는 통영 국제음악회가 가족을 위한 특별한 음악회가 되곤 했다.
이런 지쳐가는 우리의 생활에 단비가 되어준 하나의 희망, 헬싱키였다.
출장 중에 잠시 공항만 들러봤던 나는, 공항 밖으로 보이는 휘바 휘바 자작나무의 사열을 보고 난 후,
막연히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했다.
그때는 물론, 핀란드를 다시 찾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단지 희망만 피우고 있었을 뿐.
그러다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팀장을 수행하던 중 상사께서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파견교육기회를 얻게 되었고,
곧바로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지금 생각하면 아직도 신기한 기회이고, 그분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셨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을 더없는 가족으로 만들고자 하셨고, 새롭게 만들어 내고자 어려움과 기회를 동시에 주셨다.
그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던 가족들은 모두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져서 잘되었다고 축하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그토록 바랬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
회사에서의 인정을 넘어, 가족에게의 선물, 나에게 주는 커다란 보상으로서의 최고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그 감동과 고마움을 잊고 사는 것 같아 나에게 많이 아쉽다.
이렇듯 우리는, 아니 나는 여행의 경로를 이렇게 통보했다.
우리는 헬싱키로 간다.
하지만, 꼭 함께 가보고 싶었던 베를린과 프라하를 거쳐 갈 거야.
아빠, 난 가족이 같이 가면 어디든 좋아요.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기 시작했다.
7월 마지막 주 출발이지만, 그 해는 코로나도 없었고 너무나 여행이 많았던 해라,
3월에 예약을 했음에도 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연속된 세 자리를 왕복으로 예약해야 했고, 딸을 위한 기내식, 우리가 거쳐가야 할 루트와 묵을 호텔들, 경로상에서 있을 예상치 못할 부분까지 생각해 가며 즐거운 여행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내 아내도 전혀 문제없다는 듯, 무심한 듯 인터넷에서 헬싱키를 찾아본다.
그리고, 딸과 함께 앉아 베를린과 프라하를 검색하기 시작한다.
큰 가방도 주문했고, 현지에서 먹을 한국 반찬과 위급할 때 먹어야 할 라면, 상비약 등을 하나 하나 체크해 가면서 준비했다.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우리가 떠나야 할 시간은 그렇게 빨리 지나갔다.
이상하리 만큼 여행을 예약하고 난 후부터, 주말 부부의 삶은 점차 풍요롭기 시작했고, 만나면 항상 같이 할 여행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난 통영을 찾을 때면, 카페에 앉아 여행지를 검색하고, 같이 있을 우리를 상상하면서 미소를 지었고, 가족을 한껏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살짝 어깨에 올라타고 있었다.
내가 출장으로 방문한 베를린은 항상 물가가 저렴하고, 심플했으며 독일의 정취가 물씬 나는 곳이었고,
역사적이든 경제적이든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도시였다.
내가 먹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할일이 없어도 주변을 서성이게 하는 그런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런 베를린을 가족 여행지로 택한 것은, 나에게는 출장지에서의 추억을 가족과 나눔을 넘어,
이번 기회가 아니면, 베를린을 따로 찾기에는 힘들 거라는 생각에 반드시 베를린을 첫 여행지로 잡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베를린은 다소 황당하리만큼 잊지 못한 에피소드를 남김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베를린을 거쳐 조금 더 정취 있는 프라하, 그 아름다움을 가족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프라하 광장에서의 맥주, 연주회, 부대끼며 먹는 식사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겐 새로운 추억이 되어 남으리.
앞으로의 여정은 아마 우리 기억에 영원히 남아 우리를 항상 따뜻하게 해 줄 것을 예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