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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예니 Dec 03. 2023

같이 있는 건 좋지만 같이 살 수는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사람은?

네일 숍에서 옆 손님이 하는 대화를 들었다.

"같이 있는 건 좋지만, 같이 살 수는 없는 사람은?"

정답은 뭐일까? 나는 중년쯤 되어 보이는 분이시길래 정답은 '남편!'이라고 외치며 퀴즈에 참여할 뻔했다.


답은 "엄마"였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나에게도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지만, 엄마랑 함께 있는 첫날은 더할 나위 없이 아기가 엄마에게 안긴 것처럼 세상 포근함을 느낀다. 그런데 그다음 날이 될수록 내가 진짜 엄마 배에서  태어난 자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각과 취향이 달라 점점 틈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예전엔 나만 그런 줄 알고 그런 나를 자책했다.

'나를 나아주신 엄마인데, 내가 엄마랑 싸우다니. 정말 나는 못 됐어.'

하며 착한 자식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내가 잘 못 한 게 없는 날은 정말 그게 너무 억울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아는 언니,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나만 그렇단 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즉 저 퀴즈의 답에 공감할 사람들이 충분히 많다는 법칙 같은 것이었다.


"어우. 나는 외국 갔다 와서도 하루만 집에 얼굴 도장 찍고 다시 내 집으로 갈 거야. 하루 이상 있으면 싸움 나."


친한 언니의 말에 놀라서 "언니도 그래?" 라며 대화가 시작되었다.

친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늦잠 자고 싶은데 일찍 깨우는 것도 짜증 나고 여행 가면 늘 싸워. 어휴 가족 여행은 하는 게 아니야."


음... 그렇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런데 바꾸어 생각해 보면 엄마도 밖에 나가서 다른 엄마들과 딸들의 대화를 시작한다.

그럼 웃으면서 집에 돌아와 엄마가 이야기한다.

"아니 다른 집 딸도 너랑 똑같아서 오늘 진짜 공감을 많이 했다?. 그 집도 그렇나? 우리 애도 어쩌고 저쩌고~~"


그렇지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도 엄마, 세상에서 가장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사람이 바로 우리 엄마다. '엄마'라는 대화만 들어도 눈물이 날 것 같던 시간을 끝내고 강해지려 엄청 노력했다.


동물들도 자기 새끼를 낳자마자 핥으며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아무도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모성애'는 살아있는 것의 '본성'인 위대한 것인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어릴 때부터 농땡이 부리며 가정을 잘 보살피지 않던 아빠를 대신하여 외동딸인 나를 어떻게든 바른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노력하셨다.

"예전엔 너희 아버지가 몇 년을 골든벨을 울리고 다녔다."라는 엄마의 말에 그 골든벨이 "도전 골든벨"인 줄 알고 학교에 가서 "야! 우리 아빠가 골든벨을 가는 곳마다 울렸대!"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모른다. 그 골든벨을 울리는 동안 엄마는 얼마나 속이 타들어 문드러져 갔을까.


우리 집 찬장에는 20년이 더 된 자주색 양주가 보관되어 있다. 우연히 그것을 본 나는 엄마에게

"엄마 이게 왠 거야?" 물으니

"말도 마. 술은 꼴도 보기 싫다. 저것도 없애고 싶은데 아빠가 얼마나 소중히 하는지 몰래 없앨 수도 없고."

라며 손사래를 치는 엄마다. 나를 키우는 영겁의 시간 동안 엄마는 얼마나 매 밤을 외로이 지새우며 마음을 다시 다잡고 눈물을 삼키셨을까. 고이 보관된 양주병에 대조된 엄마 아빠의 삶이 비치는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우리 엄마는 나의 엄마여서가 아니라 참 곱다. 어딜 가도 엄마에게 사람들은 "참 곱다. 처녀 시절은 얼마나 더 예뻤을까?"라고 한다. 그럼 엄마는 "처녀"의 말에 옛 시절을 회상하고는 눈물을 훔치던 날도 있었다. 하루는 내 인생이 하도 힘들어 나를 따라 엄마가 철학관에 가주셨는데, 철학관에서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에휴. 결혼하자마자 행복 끝 고생 시작."이라는 말을 하셨다. 그 말에 늘 나 앞에서 강인함을 뭉쳐 살던 엄마의 벽이 허물어져 얼마나 많이 펑펑 울던지 엄마의 약한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주 매섭게 눈발이 휘날리던 그 겨울, 직장암 4기를 선고받았다. 의사도 살지 못한다고 했을 때 병원 언저리에서 간호사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어린 나이에 오랫동안 병원에서 나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나 또한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1년간을 엄마는 암 수술에 항암 치료를 받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때도 아빠는 엄마 곁을 늘 지키지 않고 참 농땡이였다. 아빠를 졸라 겨우 엄마를 1년 만에 보러 간 나는 고된 항암치료로 피골이 상접하여 해골처럼 되어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딸 하나만 바라보고 살기 위해 고생했던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소나기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무튼 엄마는 의사도 다 죽는다 하였지만, 그 힘든 시기를 겪어내며 오직 딸 하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집념만으로 지금까지 살아오셨다. 그런 엄마가 늘 내게 하는 말은 "미안하다."이다.


다른 집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좋은 차를 타는데 그렇게 좋은 차를 뽑아 주지 못해 미안하고,

엄마의 친구 중 대구에서 손꼽는 부자 친구는 딸이 태어날 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다니는데, 나는 어디 한 곳을 가더라도 비행기 표에 숙소 값 때문에 쩔쩔매게 하여 미안하고,

내가 학부모에게 너무 상처를 받아서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도 학교를 그만두지 못 하고 출근하는 나를 보며 그만두지 못하게 해서 미안하고,

백화점을 함께 갈 때마다 좋은 옷을 실컷 사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고,

더 좋은 아파트에서 살게 해주고 싶은데 전셋집에 내가 대출금을 꼬박꼬박 갚으며 자취를 하게 해서 미안하고,

엄마가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늘 아파서 여행도 같이 못 가서 미안하다고 한다.


참 미안한 것도 많다. 그러고는 말한다. "너도 엄마 돼 보면 알 거야. 자식한테 늘 더 해주고 싶지. 왜 더 안 해주고 싶겠어. 엄마가 부족해서 그래. 투자 공부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엄마가 이모나 주위 친구들처럼 이재에 밝지 않아서." 그러고는 갑자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통장에 몇 십만 원이 들어온다.

"딸~ 맛있는 것 사 먹어. 용돈해~ 엄마의 마음이야."


엄마는 평생 엄마의 이름 세 글자로 살지 못하고, 아빠를 위해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며 농땡이 아빠의 셔츠를 한 번도 미루지 않고 다렸다.


"엄마 아빠 거 다려주지 마. 뭐 하러 다려줘.?"

미운 소리에 엄마는 "그래도 아빠한테 그러면 안 돼. 네가 지금 누릴 수 있는 것도 다 아빠 덕분이고, 늘 안부 전하도 잘하고. 그래도 너는 엄마처럼 힘들어도 직업을 그만두면 안 돼. 늘 떳떳해야 해."

라고 잡초처럼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강인함을 나에게 전해준다. 아빠의 아내로, 나의 엄마로 살아간 수십 년의 희생의 세월에 엄마는 자식을 위해 무너질 것 같은 성벽을 쌓고 또 쌓는다.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존경스럽다.

우리 엄마는 어릴 때부터 공원에 계신 노숙자 분께 음식 봉사를 하러 나를 데리고 가셨고,

경비실이 있던 시절에는 매 설날 추석마다 최고급 한우를 사서 경비 아저씨게 손에 쥐어주셨고,

한 여름에 내리쬐는 햇볕에서 아파트 외벽을 칠하고 공사하시는 분을 보면 꼭 얼음물에 미숫가루를 타서 동동 뛰어 내려가셔서 전달해 주시고,

피부과에서 본 태국 청년 노동자들이 문신을 지우러 왔다는 말에(문신을 지우지 않으면 공장에서 취직을 못 한다는 말에 마음이 아파서) 10만 원씩 손에 쥐어주시며 보템이 되면 좋겠다고 하시고,

지나가다 시내 맥도널드에 혼자 앉아 계시는 노숙자 분들을 보면 나에게 카드를 주며 맥도널드에서 가장 맛있는 햄버거를 사서 쥐어드리고 오라고는 늘 하셨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참 따뜻함과 남을 배려하는 법을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우리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꼭 해주고 싶은 말을 하며 드디어 마음에 담았던 고마움을 글로 풀어내며 눈물의 글을 바친다.



힘든 시간 늘 싸우며 지금까지 버텨주어서 고맙고,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며 나에게 강인함을 보여줘서 고맙고,

어린 시절 늘 나에게 좋은 옷을 입혀 주어서 고맙고,

부족함 없이 먹고 잘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고,

무엇보다 살아있어 줘서 너무 고맙다고.


저는 너무나 풍족하게 잘 자라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미안함을 내려놓으세요.

그런 마음 늘 들게 한 제가 너무 죄송하지요.


좋은 차를 사 주지 못 해서 미안하고,

나의 돈으로 좋은 아파트에 살게 해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고

좋은 옷을 보고도 사 드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해서 미안하고

항상 직업이 너무 힘들다고 말해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미안하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내면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잘 일어났으니,

둘이서 손 잡고 남은 인생도 힘차게 현명하고 지혜롭게 꽃 비를 맞으며 나아가봅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김말희 여사님 감사합니다.


내가 엄마와 살아온 시간만큼은 엄마와 앞으로 더 함께 할 수 없음에 시간이 야속할 따름입니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면 엄마의 그 깊음을 더 이해할 수 있겠지요.

위대한 '엄마'라는 글자에 그저 눈물을 오늘도 파묻습니다.


퀴즈의 정답은 틀렸습니다.

나는  평생 함께해도 좋은 사람이 엄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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