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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nny Oct 20. 2024

22화. 잘 살고 계시나요?

인생의 우회전에도 백미러를 봐야 한다.

 

 작년에 6개월간 영어 심화연수를 들을 때였다. 호주에서 오신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 다양한 주제로 가끔 일상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어느 날 원어민 선생님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예원, 어떻게 쉬나요?"

나는 나의 쉬는 방법을 떠올리며

"저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으며 쉬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그저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는 게 쉬는 방법이었는데 그게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이 드니까 다 보고 나면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생산적인 일을 하며 쉬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원어민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한국 사람에게 어떻게 쉬는지 물으면 다들 생산적인 것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 예전에 태국에서 선생님으로 있을 때, 그때 태국 사람들의 답변은 주로 누워서 아무 생각 안 하고 쉰다는 사람이 많았는데, 한국은 쉬는 시간마저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정말 모두가 격한 공감을 하며 자신의 쉬는 방법들을 한 번씩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도와 성취가 점점 더 중요시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쉬는 것마저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도 넷플릭스만 보던 때에서 언제부터 이렇게 생산적으로 쉬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불안한 때가 시작된 것일까?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정말로 쉬는 방법을 각자가 알고 제대로 쉬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끊임없이 생산적인 것을 해서 성취감을 얻어야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억지로 누워서 넷플릭스만 보려고 하니 그것이 오히려 하루를 의미 없게 보낸 것 같아 우울해지고는 했다. 쉬는 방법이 각자 다르니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지만, 사실 이렇게 쉬는 나도 이게 쉬는 게 맞나 싶긴 하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에너지를 쓰는 행동만 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축적되는 과정이 없어 평일에 더 소진이 빨리 되나 싶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서 하면 된 것 아닌가? 오늘은 삶의 속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법인 스님이 쓰신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멈출 줄 모르는 속도와 낮출 줄 모르는 성장에 갇혀 '정신없이' 세상을 살아간다."

"오로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 '앞'과 '위'만을 바라볼 뿐, 우정과 사랑과 진리를 나누기 위하여 '옆'과 '뒤'를 보지 않는다."


행복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하는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으로 4F를 들었다. 1.Family (가족) 2.Friend(친구) 3.Fulfilling activities(성취감을 주는 활동) 4.Frame(우리 마음의 자세 혹은 관점)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찰나이다. 눈코입 3가지인데도 얼굴 생김새가 다 다르듯, 우리의 인생 2글자 안에 너무나도 다른 스토리를 담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넓은 집 평수, 좋은 차를 타고 살지만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는 행복 때문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 실컷 일에 취하여 성취감을 느끼고 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의 허함 같은 것이랄까.


 여행을 다니면 참 많은 사람을 만난다. 내가 뉴욕에 갔을 때 내 옆에서 랍스터를 먹던 한국인 친구는 이렇게 평일 뉴욕으로 여행을 올 수 있기에 "혹시 선생님이세요?"라고 물었더니 모 기업 회장의 딸이었다. 역시 모피에서부터 샤넬 백까지 그 사람의 겉에서 품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달랐다. 순간적으로 부러웠다. 하지만 내가 채울 수 있는 건강한 욕망의 선을 나는 알기에 잠시 부러움을 가지고 빠져나왔다. 인간의 욕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인터넷이 발달한 5G 세상에서 SNS를 통해 내가 모르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쉽게 엿보고 접근할수록 나의 욕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부러운 것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욕망은 나를 성장하는데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 욕망만 가지면 인생을 불행의 나락으로 빠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채찍질할 수 있는  적당선의 '욕망'을 가지되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살 것이 아니라 '옆'을 바라보며 살 줄 아는 '멋'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멋스러운 인생'인 것이다.


 나의 친구가 잘 살고 있는지 안부 전화라도 한 통 할 줄 아는 것, 친구와의 어울림을 통해 우물 안의 좁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눈높이를 느낄 수 있는 것, 가족의 소중함을 통해 소속감을 가지고 안정의 욕구를 채울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법인 스님의 말처럼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르게 잘 가고 있는지 때로는 성찰하고 뒤돌아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지름길로 머리 쓰고 가는 길이 벼랑 끝에 다다른 길일 수도 있다.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인생의 속도보다 방향을 잘 잡는 지혜를 가지는 혜안이 필요하다.


 나는 저 위의 4F 중에 1,2,3번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실천하고 있었으나 최근의 개인적인 일로 인하여 우리 마음의 자세 혹은 관점인 "프레임"에 안개가 응결되어 덧씌워졌던 것 같다. 세상이 이쯤이면 정말 나를 시험하려고 이런 시련을 계속 주시는 것인가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최근에 다시 감사일기를 씀으로써 세상의 프레임에 내부 공사를 하니 깨끗한 새 창으로 세상을 온전히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요동치던 물이 이제야 다시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색하고 성찰하고 쓰고 읽고 행동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사색의 능력을 타고나게 부여받았으므로 그 능력을 속도에 묻혀 죽이지 말고 키워나가야만 한다.

'요즘 사색하고 성찰하면 뒤쳐지고, 그런 사람일수록 밥벌이와 멀어진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미술작가 고흐도 철학자 니체도 살아있을 때 인정받지 못했다. 사색과 경제력은 거리가 그 당시에도 상관관계가 멀었다. 하지만 우리는 인정받기 위하여, 경제력에 비례하기 때문에 사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세상의 오감을 느끼며 살수록 재미없고 시들한 흑백의 세상은 다양한 색깔의 컬러 TV로 생기를 부여받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언니 중 한 명은 함께 다니면 늘 행복해진다. 이 언니는 늘 항상 하는 말이 "와~ 너무 좋다. 너무 행복하다."이다. (이 언니는 그렇다고 천천히 살지도 않는다. 늘 공부하고 지금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매진하고 있다.)

하루는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어떻게 그렇게 매일 행복해?"

그러니 언니가 하는 말.

"그냥. 모든 게 다 아름답잖아. 공기. 냄새.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


 꽃을 보면 어떻게 저런 빛깔을 기계로 입히지도 않았는데 뿜어낼까 참 궁금하다. 새의 깃털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부터 나도 '이런 생각을 할수록 친구와 친하게 지내기 힘들 거야. 감성을 많이 버려야겠어.'라고 생각을 하고 일부러 오감의 버튼을 끄기로 했다.


 그런데 유별나게 성공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오감'이 발달된 사람들이다. 흑백 요리사의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그중에 '미각'이 발달했고,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형태의 변화를 표현하려는 미술양식인 "인상주의" 모네도 얼마나 '시각'과 관찰력이 발달했는가. 이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속도만 중요시했다면 우리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결국 뒤와 옆을 돌아볼 줄 아는 것,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느낄 줄 아는 것, 오감을 살려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것이 곧 멋이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바른 속도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부실공사로 빠르게 지은 집 보다 튼튼하게 내진 설계를 하여 천천히 지은 집에 다들 살고 싶지 않은가.


위의 4F를 가지고 나도 정말 멋을 향유할 줄 아는, 풍부함 보다 풍족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시 깨다는 하루다. 멋지게 휴식을 취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인생의 우회전을 할 때도 백미러를 봐야 하고, 좌회전할 때도 사이드 미러를 봐야 한다. 앞만 보고서는 안전한 운전을 할 수 없다. 우리의 인생도 운전을 똑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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