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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동적 노인의학자 Jan 16. 2021

영어 연구 발표, 버벅이지 않고 쉽게 하는 지름길

학술지 에디터에게 듣는 연구 이야기

이제 의학 연구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지가 10년을 얼추 넘게 된 것 같다. 처음에는 IMRaD(introduction, methods, results and discussion)포맷으로 글을 쓰는 것도 너무 힘이 들고, 내가 쓴 논문이 세 편만 되면 논문쓰기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2007년 경이었던가, 처음으로 원고를 쓴 영어논문은 영원히 출간되지 못했다. 그러던 젖먹이가 이제는 한 노인의학 저널에서 간사로 일을 하며 어떻게 보면 의학 연구 자체가 삶의 중심이 되는 데 까지 온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막 시작하는 후배들의 연구를 도울 일들이 생기는데, 그렇게 이야기해주던 것들을 모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연구를 하다 보면 영어로 강의나 발표를 할 일이 꽤 자주 생긴다. 나는 8년 전에 처음으로 해외 해외 연구자들이 있는 곳에서 영어로 연구 내용을 발표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는데, 그 때 까지 해외에 나가서 기거한 기간이 평생 다 합쳐도 10일도 되지 않는 터였고 평생 영어라는 것을 잘 해본 기억도 없었기에 아찔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중학교 때 까지는 학교 영어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것 조차 힘들었었고, 영어 말하기 대회 같은 것은 완전 다른 나라 이야기였으니까. 


일단 급하니까 이 때는 위에서 배우고 또 남들이 하는 것 처럼, 대본을 만들어서 읽었다. 결과적으로는 대참사였다. 보이지도 않는 버벅 버벅 거리며 읽게 되었을 뿐 더러, 청중과 눈을 맞추지도 못하니,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그 후 몇 달 동안, 이 문제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 지를 도서관에서 프리젠테이션과 관련된 자료들을 죄다 읽어가며 고민했던 것 같다. 첫 대참사 이후 1년이 지난 시점에 보다 큰 규모의 청중을 대상으로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는 상당히 잘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는 영어 발표를 가지고 심사에 나가서 거의 1:100 에 가까운 경쟁을 뚫고 연구비를 따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또 몇 년이 흐른 지금은 우리말 발표나 영어 발표를 큰 차이 없이(물론 영어 원어민이 보기에는 몹시 후져 보일 수도 있겠지만..) 준비하고 또 마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직도 더 나아지기 위해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래도 그 동안 끔찍한 초보 시절을 탈출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가장 기본적인 부분들을 정리해본다.


무엇이 문제고 무엇을 고치는게 중요했던 걸까?


1. 무엇을, 어떻게 말 할 것인가

대본을 읽는것, 또는 그것을 외우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문제였다. 대본을 읽게 되면, 거기에 의존하게 되어 청중과 소통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해진다. 제대로 읽히지 않으면 거기서 막히게 된다. 발표는 정치인이나 아나운서가 프롬프터를 읽는 식으로는 할 수가 없다. 대본을 그대로 외는 것도 좋지 않다. 한번 막히면 다음으로 이행이 잘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이 허둥대는 발표를 초래하게 된다.


대본이나 키워드를 준비하는 것은 도움이 되는데, 이것을 '참고' 해서 실제로 발표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애드립의 무한한 조합으로 내용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달할 수 있는 머릿속의 지도를 만들면 된다. 아래 그림처럼, 한가지 내용을 설명하는 문장은 무한하게 나름인데, 내용은 어느정도 정해 놓아야 하지만 문장을 하나로 특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특별히 의도한 문장을 골라서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된다.

키워드를 지침으로 두고, 어느정도 만들어진 발표 자료를 슬라이드 쇼 모드로 놓고 예정된 발표 시간보다 여유있다고 생각을 하고, 일단 문법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말로 해 본다. 이것을 수 차례에 걸쳐서 다듬어가면서 머릿속에 수많은 우회로를 만들고, 또 더 좋은 설명 방법을 떠올리기도 하고, 하면 점차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2. 구체적인 연습 방법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이라는 상투적인 말이 있다. 순환 논리라서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기는 하지만, 발표 연습은 정말 실전처럼 하는게 좋다. 어느 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발표의 가닥이 잡히면 스크린이나 대화면에 발표 자료를 슬라이드 쇼를 하면서 가상의 청중에게 발표를 하는 식으로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효과적인 발표는 교과서적으로는 연단(포디엄)에서 나와서 스크린에 가까이 가서, 스크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보면서 해야 하므로, 가급적 연습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아직까지 연구 발표나 강의는 연단에서 하도록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으나, 연습에서 화면이 아닌 청중을 바라보고 하는 것을 습관화 하면 연단에서 하는 강의도 전달력이 좋아지게 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슬라이드 노트를 인쇄해서 그것만 들여다 본다. 아니다. 실제와 같은 환경을 조성해서 연습해야 한다. 저녁에 빈 회의실을 빌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집에서 모니터를 등지고 서서 연습하는 것도 방법이다.


실력을 늘이고, 결과도 좋게 만들고 싶다면 스스로의 발표를 녹음, 녹화를 해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스마트폰 덕에 아주 쉬운 일이 되었다. 이런 것을 녹화해서 돈을 받고 수정할 부분을 고쳐주는 서비스도 있는데, 강의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처음에는 자기가 녹화해서 보는 것 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포인트를 개선할 수 있다. 한국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영어 단어를 뚝뚝 끊어서 읽고 억양과 강세가 없거나 이상한 경우가 많다. 또 잠시 쉬어야 하는 부분(절이나 문장 간격)을 잘 지켜주지 않아서 단조롭고 듣기 어렵고 전달력이 떨어지는 발표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자기 발표를 녹음을 해서 들어보면 고치기가 쉽다. 같은 내용을 영어 text to speech(TTS) 프로그램에 입력해서 들어보거나, 여력이 된다면 원어민에게 읽어봐달라고 해서 스스로의 말하기와 비교하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된다. 그리고 몸짓이나 적절한 상체의 움직임 같은 것도(특히 연단 밖에서 나와서 발표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녹화를 해서 보면 개선할 부분들이 저절로 눈에 띈다. 무척 발표를 잘 하는 동료가 알려준 팁인데, 연습 과정에서는 의도적으로 평소보다 조금 더 크고, 또박또박 말 하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된다.


3. 연습 일정 계획하기

발표의 결과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마지막까지 슬라이드를 만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30분짜리 영어 발표여서 준비 시간을 10시간 가진다고 하면, 슬라이드를 만드는데 4 정도, 그것을 연습하는 데 6 정도를 쓰는게 더 적절한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결과의 제한 요인은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최종 결과) =  (내용) * (슬라이드) * (발표)


사기꾼은 '내용 전달'을 잘 하는 것이 직업인 셈인데, 슬라이드 장표와 언변만 가지고 말도 안되는 내용의 회사를 차려서 투자를 받는 사람들도 있는데, 많은 연구자들은 아주 많은 연구 내용을 가지고도 발표를 잘 못해서 최종적으로는 내용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내용이 100, 슬라이드가 100이라도 발표가 0이면 최종 결과는 0이다. 심지어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마구 뒤섞고 복잡하게 만들어서 청중이 본인의 연구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인(설마이겠냐만..) 것 처럼 발표를 하는 연구자들도 무척 많다.


사람은 적절한 수면을 취해야 학습 내용을 장기 기억으로 만들 수 있으므로, 정말 좋은 발표를 하려면 여러 날에 걸쳐 연습을 해야 한다. 만약 토요일이 발표라고 하면, 예를 들어 화, 수, 목, 금에 걸쳐 저녁 시간에 한시간 정도를 할애하는 편이 금요일 한번에 4시간을 할애하는 편 보다 훨씬 낫다.

  

첫 날에는 화면을 보면서 일단 중얼중얼 말을 하면서 발표의 초안을 만들어 나가고, 두번째 날에는 조금 여유있게 말을 하면서 유연하게 다듬고, 세번째 날은 화면을 점점 보지 않고, 네번째 날에는 시간까지 지켜서 (보통은 할애된 시간에서 5% 정도는 더 빨리 끝나게 연습하는게 좋은 것 같다.) 하는 식으로 해야 한다. 


4. 실전

이렇게 준비하면 당연히 대본은 필요 없다. 영어 발표를 대본을 가지고 나와서 발표하는 연자를 아직도 흔히 보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발표의 결과를 나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세운 것이나 다름이 없는 노릇이다. 


가볍게 나가자. 마이크를 향해 발표를 하러 나갈때는 미소를 띄고 나가는 것이 좋다. Fight or flight 반응이 저절로 사라지며 발표가 잘 된다. 연습을 하였으므로 청중을 보며 발표할 수 있다. 사고 흐름의 지도가 며칠새 머릿속에 생겨 있으므로, 발표를 하다가 갑자기 막히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발표를 마치면 어떤 포인트가 부족했는지를 고민하라. 이런 연습과 실전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것은 구성요소들을 끊임없지 개선하는 일종의 린 프로세스(lean process)의 사이클을 만드는 셈이 된다. 이렇게 한두번 개선의 경험을 하면서 자기만의 영어 발표 노하우를 갖춰나가면 시간이 지나며 점차 좋은 연구 발표를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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