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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지식박사 Mar 22. 2024

취미가 있는 사람

홍예글방 시즌1(2022) - 글1

  “모리 취미 필요해.”

  한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팀이 기타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맞아. 그렇지.. 고마워.” 

  기타를 받으면서 팀과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활동가로서의 일을 하며 경험하게 된 번아웃과, 활동가가 번아웃되지 않는 조직 구조를 만들기 위해 추가로 하게 된 일들. 그 고민 상담의 처방약으로 기타를 받을 줄은 몰랐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래도 내가 그 기타를 칠 것 같지는 않았다.


  활동가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번아웃을 경험했다. 해야할 일들과 알아야 할 사건들이 텔레그램방과 페이스북 피드에 쉴새 없이 올라왔다. 밤낮 구분도 없었다. 머릿 속엔 하루종일 일 생각만 가득했다. 문제는 그게 좋았다는 거다. 내가 온전히 쓰일 수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산적한 할 일들을 마주하면 설렜다. 그때쯤 내 운동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사회변화가 더 빨라지면, 어쩌면 나도 ‘결혼 적령기’에 동성결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큰누나가 결혼한 스물 아홉 쯤에 나도 결혼을 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5년 안에 동성혼 법제화가 되어야 했는데, 2012년의 퀴어 운동은 갈 길이 멀어보였다. 제일 크다는 퀴어 단체에 신입회원으로 들어갔는데, 사무실도 열악하고 상임활동가는 한 명 밖에 없었다. 홍보도 잘 안 되고 사업도 별로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은 활동의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마음을 급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했다. 급한 마음은 때로 열심히 활동하지 않는 동료들에 대한 불만이 되기도 했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활동을 시작하고 1년 쯤 됐을 때 처음으로 동료와 크게 싸웠다. 집회에 가져갈 피켓의 문구를 단톡방에서 논의했는데, 내가 제안한 “며느리가 남자라니 농번기에 좋겠구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본 누군가가 집회 이후에 문제제기를 했다. 꽤 재밌는 문구여서 파급력이 컸던 피켓이었다. 하지만 재밌으면서 동시에 ‘PC(politically correct: 정치적으로 올바른)’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지금이라면 빠르게 사과하고 다음 번엔 조심하겠다고 할 텐데,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며느리를 일꾼으로만 보아온 기나긴 성차별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문제제기에 나는 피켓 문구의 통쾌함과 파급력에 비해 그 문제제기는 너무 확대해석한 것이 아니냐고 맞섰다. 다른 사람들이 다 보는 페이스북 피드에서 보란듯이 개처럼 싸웠다. 이렇게 하나하나 검열해서 언제 세상을 바꿀 거냐고, 무서워서 운동에 누가 참여하겠냐고, 그러는 너는 피켓 문구 아이디어 냈었냐고. 

  싸우고 나면 온 힘이 다 빠졌다.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각자가 불행한 사람들끼리 싸우면 서로 상처만 주고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열정이 너무 큰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치면서 지나간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번아웃을 경험한 후로는 ‘지속가능한 운동’이 주요 관심사가 됐다. 단체 회원들의 성장을 위한 사업을 기획하거나, 사회운동방법론 같은 것들을 배우러다니기도 했다. 그 즈음부터는 운동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게 된 것 같다. “게이이지만 흠 없는 삶”이라는 꿈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부르주아적인 욕심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그 꿈을 포기하면서 비로소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과 비슷한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이기는 게 아니라 잘 지는 법, 느리더라도 함께 가는 법 같은 ‘순진한’ 방법들만이 운동의 유일한 길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그렇게 제법 활동을 이어가다가, 결국엔 활동을 접고 부모님 집으로 내려오게 됐다. 번아웃 이후로 ‘균형’을 찾으며 활동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더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6년을 활동하고 내려온지 며칠 후엔 ‘전쟁에서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3년동안 이런 저런 직업에 도전했는데, 모두 금방 그만두고 대부분의 시간은 실업 상태로 보냈다. 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직업을 바꾸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자의반 타의반으로 3년을 한량처럼 쉬긴 했는데, 그래도 집에서 흥청망청 쓴 시간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건 아니다. 

  그동안에 비로소 나는 취미를 갖게 됐다. 책도 읽고, 식물도 키우기 시작했다. “생산성 덕후”인 나는 아마도 오랜 실업 상태를 겪지 않았다면 취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 같다. 아무런 목적 없이 무용하게 지냈던 시간이었기에, 관심사로만 머무르고 있었던 것들이 취미로 진화할 수 있었다. 평일 대낮에 동네 공공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가 그랬고, 멍하게 보던 유튜브에서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잎을 가진 ‘필로덴드론 글로리오섬’이라는 열대 식물의 아름다움에 반했을 때가 그랬다. 

  책을 읽을 때도, 식물을 돌볼 때도 똑같이 느끼는 한 가지가 있다. 온전히 나를 위해 이 시간을 쓰고 있다는 것. 미래의 무언가를 위해서 현재를 참고 견딜 때와는 다른 충만함이 있다. 아무런 목적도 없기에 온전히 나를 위한 ‘사치’가 된다. 독서에 취미를 붙이고 얼마 후에 이걸 깨달았는데, 그제야 팀이 내게 처방전처럼 기타를 건넨 이유가 이해됐다. 내게는 나를 돌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데, 내면에 차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소진(burnout)될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선배 활동가가 페이스북 피드에 ‘사적인 삶’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써놓은 걸 봤던 기억이 난다. 그 때도 여전히 취미 같은 것은 없었던 시절이라, 뭔가 내게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은 막연히 들었는데, 사적인 삶이라는게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사적인 삶을 가질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넘어갔다. 결국은 활동도 다 그만두고 서울 생활도 다 포기하고나서야 배우게 될 줄이야. 


  내게 취미를 선물했던 실업 상태도 끝이 났다. 3년 반을 꼬박 채우고 드디어 풀타임 직장에 취직했는데, 통근시간이 왕복 3시간이었다. 집 밖에서 매일 12시간을 있어야 했기에 자연히 취직 전에 가졌던 취미들은 뒷전이 됐다. 그래도 꿋꿋이 통근 지하철에서 독서는 했지만 식물을 돌보는 일은 어려움이 많았다. 때마침 겨울이어서,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한 열대식물들 중엔 초록별로 간 녀석들도 있었다. 물론 퇴근 후에 조금씩 돌봤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겠지만, 집에 돌아오면 정말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취미와 일의 중간 정도에 있었던 홍예당 일은 정말이지 아예 손을 놓아버리게 됐다. 홍예당 일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는데, 도저히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작년부터 도전해보자고 얘기했던 평균 3000만원, 최대 5000만원의 지원금을 주는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의 신청서는 쓰지도 못했다. 홍예당의 신청서를 써야할 때 나는 같은 사업에 낼 회사의 신청서를 쓰고 있었다. 회사에서 낸 신청서는 최종합격까지 했다. 끊었던 담배를 줄창 피우면서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하는 생각을 했다. 홍예당 일을 하려고 돈을 버는 건데, 홍예당이 서서히 망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타들어갔다. 첫 출근 때 다짐했던 ‘1년만 버티자’는 6개월이 되고, 6개월까지 참을 수가 없어서 5개월만 채우고 퇴사했다. 퇴사한 바로 다음날부터 행복했다.

  먹고 살 걱정을 하는 가난도 있고, 꿈이 없는 가난도 있지만, 시간의 가난도 있다.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을 할 시간이 없다면 그런 삶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가사노동으로 집을 돌볼 시간도, 취미를 이어갈 시간도, 다른 꿈을 꿀 시간도 필요하다. 보다 정확히는 그럴 시간과 마음의 여유까지도 필요하다. 그래야 소진만 되는 게 아니라 채워지기도 한다. 


  다행히 퇴사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음 직장을 잡았다. 주 3일을 일하고, 통근 시간은 왕복 30분이다. 하고 싶었던 분야의 일이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어서 커밍아웃도 하고 지낸다. 출근은 1시이고 퇴근은 밤 9시인데, 그래서 근무일에도 오전에 식물을 돌볼 시간이 있고, 일하지 않는 4일 동안 책도 읽고 홍예당 일도 할 수 있다. 문화공간을 운영하는 일이어서 내가 담당하는 악기 수업에 청강생으로 들어가 우쿨렐레도 배우기 시작했다. 삶에 여유가 생길 때마다 취미가 하나씩 늘어간다. 더이상 어떻게 하면 사적인 삶을 가질 수 있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조만간 팀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 기타는 아니지만 우쿨렐레는 치고 있다고, 약발이 좋았다고.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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