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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Oct 06. 2020

명절 때 한 일이라고는 고작

일상 에세이



추석 때 조카 네가 왔다. 코로나 시기라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꼼짝 않고 집에만 있었다. 딱 이 자세로 서른 시간 정도를 먹고 마시다 졸면 한 편에서 좀 자다가 일어나서 또 마시고 먹고 이야기를 하다가 또 잠 오면 누워서 쿨쿨 자다가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접시 위에 음식이 떨어지면 다시 채워 놓고 술이 떨어지면 다른 술을 가져다가 먹고 마셨다. 중간에 나는 일어나서 먹은 것을 빼기 위해 집 근처 저수지를 한 시간 정도 또 신나게 달렸다. 하지만 무용지물.


조카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키가 큰 지 아버지 때문에 초등학생이 벌써 160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 지 친구들 중에서는 가장 키가 작다고 한다. 동생의 남편은 암튼 잘 먹는다. 많이 먹는다. 키가 커서 그런지 먹는 것이 살로 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인다. 불평등의 세상이다. 늘 그렇듯이 결혼을 할 때에는 동생의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반대를 했던 모친이었는데, 역시 늘 그렇듯이 지금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 동생과 동생의 남편은 기자와 카메라맨으로 만났다.


동생은 여자치고 참으로 무뚝뚝하고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교복만 입은 모습만 봤는데 어느 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생활을 하러 떠나서 그곳에서 취직을 하고 남편을 만나 조카를 낳고 눌러앉아 버렸다. 대학교 졸업을 하기 전 모친이 동생이 살고 있는 집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한 번 올라가 보라고 해서 올라가서 며칠 지냈던 적이 있었다.


영화 기생충처럼 말로만 듣던,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단 한 채도 없는 반지하였다. 동생은 한양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가까운 뚝섬에서 자취를 했다. 동생은 일찍 취직이 되어서 쪼랩 기자라서 새벽부터 나가고 나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아침이라 눈을 떴는데 아직 컴컴해서 이제 한 8시 정도 되었나? 싶었는데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다. 맙소사. 그런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서울예전 사진 과에 친구가 다니고 있어서 그치들과 어울려 충무로, 명동 같은 곳을 휘저으며 돌아다니고 술을 마시느라 늦게 동생 집에 들어와서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그렇게 오후가 된 시간이었다. 반지하는 불을 켜지 않으면 컴컴했다. 창문을 열면 정말 땅바닥이 반 정도 보였다. 동생은 대학교 다닐 때 학교신문에 학생 운동에 관한 만화를 그려서 연재를 하다가 기관에서 잡으러 와서 잠깐 해외에 도망 다니기도 했다. 지금 아이의 엄마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동생 남편은 큰 ENG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동생이 꼭지 기사를 따는 곳에서 조를 형성해서 같이 붙어 다녔다. 동생 남편은 외주 회사 소속으로 방송국 일이 없을 때는 가수들의 공연을 따라다니며 공연을 촬영하기도 하는 일을 했다. 한 번은 그때도 명절이었는데, 동생이 집으로 오면서 꼭지를 하나 따서 가야 한다며 자신의 짐과 함께 큰 ENG 카메라까지 들고 왔다. 동생 남편은 당시에는 결혼하기 전이라 전라도의 집으로 가야 했다. 때문에 동생 남편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하라는 것이다.

다음 날 오전 일찍 집에서 출발해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지정된 곳에서 인터뷰를 따고 하는데 카메라에 배터리가 다 됐다는 알림 등이 켜졌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동생이 그 전날 충전을 한다고 했는데 잘못한 것이었다. 관계처에서 우리에게 일단 점심으로 중국음식을 시켜 주었고 우리는 그걸 먹으면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할 수 없이 집에서 명절 준비를 하고 있을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지금 네가 우리 집으로 가서 보조 배터리를 들고 여기, 부산 무슨무슨 동 무슨무슨 건물까지 와야겠다고 했다.


그렇게 몇 시간 뒤에 친구는 배터리를 들고 와서 다시 인터뷰를 따고 촬영을 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의 인터뷰는 관계된 사람들의 인터뷰라 미리 연락이 되어 있어서 인지 순조롭게 했지만 다음 인터뷰는 길거리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티브이를 볼 때는 모두가 인터뷰에 잘 따라주는 걸로만 생각했는데 전혀, 1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친구가 지나가는 행인처럼 해서 인터뷰를 땄다. 엉망진창이었다. 심한 사투리에 힐끔거리는 어정쩡한 모습이나 몇 줄 안 되는 것도 숙지하지 못해서 제멋대로 말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내가 호기롭게 했다. 친구가 카메를 들고.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둘이서 엔지를 얼마나 냈는지 모른다. 주작을 하는 것도 이렇게나 어려웠다. 시간 흐른 후에 동생이 회사에서 우리가 나온 영상만 따로 분리해서 보내줬는데 보자마자 바로 폐기 처분했다. 정말 보기 싫었다.


둘이 결혼하기 전 한 번은 동생 남편인 그 녀석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있는 도시에 공연이 있어서 이틀 동안 머무르다 이제 가게 되었다고 만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곳까지 가서 그 녀석을 만났다. 그 녀석은 국밥을 먹으면서 소주를 한 병이나 금방 비웠다. 그러더니 나에게 어머니에게 드릴 용돈을 봉투에 넣어서 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전달하려면 직접 하라고 했다.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없다. 단지 그 녀석은 술을 마시고 나는 차가 있어서 밥만 먹었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데 차 뒷문으로 돈을 휙 던지고 가는 것이다.


동생에게 연락이 와서 이런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둘이는 헤어졌다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그리고 7개월인가 8개월 정도 지나서 둘이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다시 만나고 싸우고 뭐 그런 일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친은 그 녀석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결혼을 반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동생이 같이 사는 건 모친이 아니라 그 녀석이다. 둘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왜냐하면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집에서 떨어져 나가 꽤 긴 시간 동안 홀로 어딘가에 부딪히면서 지냈기 때문에다- 그렇게 믿어주는 게 맞다.


동생은 영양실조로 한 번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었는데 한창 바쁠 때에는 5시에 일어나서 일하러 가서 자정 전에는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밥도 끼니를 때우는 식으로 이동을 하면서 김밥이나 샌드위치 같은 것으로 먹다 보니 아마도 그렇게 쓰러졌다. 그때 옆에서 간호를 해 주었던 사람이 그 녀석이었다. 사랑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조금씩 이어 붙는다. 둘은 동갑이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거나 호칭을 빼고 말하거나 이렇게 둘러앉아서 하루 종일 술을 마실 때면 야, 니, 같은 호칭을 한다.


니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아니야 니가 그랬지.
서로 니가 했니 네가 했니 하다가 조카에게 바통이 넘어간다.
지인아 그때 엄마야? 아빠야?


결혼식은 명동에서 했다. 주례가 없었다. 결혼식은 한 10분? 아니다 한 20분? 만에 끝나고 식사시간이 아주 길었다. 한두 시간 정도 되었다. 식사시간이 기니까 아주 좋았다. 두 사람은 축의금 전부를 하객의 식사에 쏟아부었다. 그러고도 아마 두 사람의 돈이 더 들어갔다. 참 이상한 녀석들이다. 이 이상한 행동은 후에도 한 번 하게 된다.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식탁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그때가 이미 임신 5개월 째라는 것도 나는 몰랐다. 모친은 나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고 했다. 이유는 내가 알면 큰일 날 줄 알았다고 한다. 소리 지르고 큰일 내는 건 전혀 나의 스타일이 아니고 모친도 나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텐데 참 이상했다. 나는 애가 딸린 남자와 결혼을 하던, 결혼을 하기 전에 애를 낳던 둘이 좋으면 나는 그만이다. 지금까지 두 사람에 대해서, 조카에 대해서, 조카 네가 사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웨딩앨범을 나에게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그래 알겠어.라고 하고는 아직까지 못 만들어주고 있다. 하하하.


아기가 태어나니 자유로운 영혼, 잔다르크 같았던 동생은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살고 있는 곳을 떠나 경기도로 이전을 했고 힘든 기자 생활을 버리고 좀 더 나은, 월급을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동시에 그 녀석도 카메라를 던져 버리고 꼬박꼬박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갔다. 아이의 존재가 두 사람에 컸던지 조카가 태어나고 두 사람의 모든 방향이 조카에게로 쏟아졌다. 위에서 말 한 이상한 일을 한 번 더 한 것이 조카의 첫 돌잔치도 하지 않았다. 그간 주위 사람들의 경조사에 다니면서 뿌린 경조사비를 악착같이 받아야 해?라고 하더니 백일 사진은 우리 집, 거실에서 천을 배경 삼아 대충 찍어서 액자로 만들었고 돌잔치도 어딘가 뷔페에서 하지 않고 집에서 조촐하게 하고 그대로 넘어갔다.  돈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집착은 하지 않았다. 동생의 남편은 장사를 해보고 싶다며 또 편의점을 몇 년 운영하기도 했다. 참 재미있는 녀석들이다.


백일사진을 집에서 찍다니! 야 이것들아 너무 힘들다
100일 동안 살았지만 이렇게 삶이 힘든 거였어?
야! 이것들아! 살살 좀 해라!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이런 식으로 백일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아이의 방을 따로 마련할 수 있는 집을 구하고 자동차를 바꾸고 그렇게 사는 꼴이 바뀌었다. 급진적인 면모나 어딘가에 대항을 하거나 마냥 나 좋아서 하는 일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에서 멀어졌다든가 불행하다든가 하는 모습은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기 전에 정기적으로 유기견보호센터를 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는데 곧 안락사를 당할 땅콩이와 눈이 마주쳐 그만 분양을 하고 말았다. 


우리 집에도 유기견 두 마리가 이미 살고 있었다.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둘 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그대로 가족이 되어 버린 녀석들이다. 그래서 조카가 태어나기 전에 땅콩이를 데리고 집에 오면 집이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조카는 불행하게도 개털 알레르기를 달고 태어났다. 같이 지낼 수 없었다. 그랬던 녀석들이 지금은 모두 별이 되었다. 모두 잘 화장해서 잘 묻어 주었다. 버림받았지만 우리와 지내는 동안 조금은 행복했으리라 생각한다.


집에는 이미 유기견 두 마리가 있었다
티박이와 곱슬이. 거기서 편안하게 잘 살고 있지? 모기소리에 놀라지 말고


그렇게 한 가족의 형태를 갖춘 조카 네는 경기도의 한 곳, 한 집에서 서로 옹기종기 모여 지내고 있었다. 조카가 걷기 시작하고 어린이 집에 다니게 되었다. 동생과 동생의 남편은 조카의 교육을 위해 학군이 좋은 곳으로 다시 이사를 하게 되어서 그곳의 어린이 집에 보내게 되었다. 소문이 좋은 어린이 집이었다. 들어가기도 힘든 어린이 집으로 경쟁률 또한 치열했다. 동생과 동생의 남편은 이왕 다닐 거 좋은 곳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가르치자고 생각했다. 거기에 다닌 지 일 년 정도가 지났을 때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조카는 집으로 오면 엄마와 한 시간 정도 집 근처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동생은 당시에 교육을 위해 재택근무로 돌렸고 회사에서는 그렇게 해 주었다. 업무에 차질이 없다면 그렇게 해주는 회사와 동료들이 고마웠다. 내가 아니라 동생이 그런 마음이었다. 조카는 엄마의 손을 잡고 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신기한 것들에 대해서 말을 쏟아낼 때였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서 울며불며 어린이 집으로 들어갈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났고 이불도 혼자 개고 먹을 때에도 가만 앉아서 먹는다. 모든 게 엄마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산책을 하는 조카가 자꾸 한쪽 다리를 저는 것이다.


다리가 아프다, 이쪽 다리가 아프다, 산책을 한지 시간이 지나면 절뚝거리는 정도가 조금 심해졌다. 동생은 조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더니 이건 맞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아니라 구타가 지속적으로 된 것이다. 의사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조카를 위해 소문 좋은 어린이 집에 보냈는데 다리를 절뚝거릴 정도가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마음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의사의 소견서, 경찰, 보건소, 등등의 사람들과 함께 어린이 집의 추궁에 들어갔다. 두 살 많은 남자아이가 조카의 다리를 지속적으로 걷어 찬 것이다. 그 남자아이에게 다리를 걷어 차인 아이가 조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남자아이는 그 어린이 집 원장의 막내아들로 끔찍이도 아끼는 자식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쉬쉬하게 된 것이다. 쉬쉬한 것이 먹힌 것은 그 어린이 집이 발도로프 교육으로 정평이 난 집이었다. 그 후 아이와 아이들, 그리고 부모들 모두가 상처를 떠안게 되었다.


티라미수를 처음 맛 본 날


뭐가 뭔지 아직 모를 때


할모니에게 귀마개 쓰는 방법을 알려주며 재미있는 한 때


그런 일들을 겪고 지금 우리는 한 밥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셨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야기도 있었다. 옆에서는 다리가 붉은 노을의 꽁지처럼 긴 조카가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보통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은 저축을 하려고 한다. 행복이라는 게 먼 미래에 필요할 때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재미있게 지내면 그만이다. 그 사실을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마치 대학교 시절 엠티를 온 것 같은, 어디 펜션에 놀러 와서 하루 종일 먹고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렇게 집구석에 꼼짝 안고 앉아서 보냈던 명절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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