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마지막 회에서 기훈이가 형에게 이지안의 안부를 묻고 박동훈은 전화가 오지 않아서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기훈이가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5분 보다가 꺼버렸다고. 가장 오빠가 12살인데 동생들을 위해 다니면서 구걸하는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못 보겠더라고. 내가 티브이 속으로 들어가서 애들을 꺼내오고 싶다고. 기훈이가 기훈이 스타일로 이야기를 할 때 박동훈은 박동훈 스타일로 덤덤하게 듣는다. 그리고 기훈이가 말한다. 다음 날 다시 봤는데 보기 잘했다고, 아이들은 똑똑하게 잘 살아간다고,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다고. 아이들은 다 자가 치유능력을 가지고 있더라고. 기훈이는 자신의 형과 이지안을 위해서 자신의 스타일로 그렇게 위로해준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로, 누군가 나에게 정말 무서운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이 영화를 추천해준다. 에이 그게 뭐야?라고 하지만 일단 보고 나면 정말 무서워서 영화가 끝나도 한동안은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폭력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흔한 폭력이 아니다. 소외와 방치에 관한 폭력이다. 엄마에게 버려진 4남매가 도시 속에서 망가져가는 이야기다. 그것이 너무 현실적이고 덤덤하게 흘러가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나의 아저씨에서 기훈이가 말하는 것처럼 영화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고 싶다.
유키는 큰 오빠 아키라에게 몇 달 전에 받은 초콜릿 과자를 먹다 남겨 놓은 것을 꺼내 먹는다. 그 장면은 그저 물 흘러가듯 지나가는데 유키가 꼭 어떻게 될 것 같아서 내내 조마조마하다. 유키를 죽이지 말라고, 깨끗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유키를 죽이지 말라고, 고레에다 감독에게 빌고 또 빌었다. 당신의 다른 영화에서는 사람을, 유키 같은 아이를 죽이지는 않잖아. 인형을 좋아하던 인형 같던 유키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영영 인형이 된다. 제발 죽이지만 말라고, 하지만 영화는 나에게 말했다. 유키는 죽은 게 아니야, 비행기를 타는 것뿐이야.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너무너무 슬픈데, 미친것처럼 슬픈데, 정말 슬픈데 그 슬픔이 건조하여 슬픔으로 하여금 눈물이 흐르게 하지 않는다.
소외된 이들에게 쏟아진 무차별적 폭력을 온몸으로 받는 아키라와 차별로 인한 무차별적 방치를 그대로 받아들인 유키는 결국 하나의 길로 간다. 아이들을 무섭게 방치하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현실 속 배고픔을 견디는 아이들은 그래도 밝기만 하다. 손톱 하나라도 놓치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데 아이들은 내일을 오늘처럼 살아간다. 방치하고 차별하는 영화 속 어른들이 죽일 만큼 밉지만 그 모습에서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외롭다. 외로워서 사진을 올리고 일과를 적는다. 고독해야 하는데 고독은 소거되고 외롭기만 할 뿐이라 견디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후 아이들은 잘 살아갈 것이다. 기훈의 말처럼 남은 아이들은 자가 치유능력이 있다. 아이들은 나름 힘이 있다. 또 동훈의 말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남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거, 그거 다 아무것도 아니다. 겸덕이 동훈에게 한 말처럼 네가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하다. 지안이 행복해지면 모두가 행복하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도 아이들은 불행하지만 노력해서 행복해질 것이다. 기훈의 말대로 아이들은 똑똑하니까. 더불어 이 글을 보는 사람들 역시 본인이 행복해야 주위가 행복해진다.
박해영 작가가 나의 아저씨 각본을 들고 김원석 감독을 찾아갔을 때 읽어 보니 너무 좋은 것이다. 하지만 바로 시작하지 말고 코믹물 하나를 먼저 만들어서 찍고 난 다음 ‘나의 아저씨’를 연출하자고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또 오해영’이다. 그리고 ‘나의 아저씨’가 나왔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 자랑스러운 어른, 멋진 어른이고자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그런 어른보다 좋은 어른으로 남자. 좋은 말, 좋은 글처럼 좋은 어른이 가장 좋으니까. 아플 때는 미쳐버릴 것처럼 아파하자. 우리에겐 다 자가 치유능력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