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스턴
휘트니 휴스턴은 나에게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가 회사에서 오시는 시간에는 동생 손을 잡고 종종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갔다, 버스가 내리는 곳에는 ‘제일 레코드’가 있어서 늘 음악이 나왔는데 주로 팝송이었다. 게 중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가 많이 나왔다.
생각해보면 안 그럴 것 같지만 바다가 있는 이 도시에도 예전에는 거리에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가 가득 울려 퍼졌다. 요즘 미용실만큼 많은 레코드 가게 앞의 스피커에서 경쟁이라도 하듯 휘트니 휴스턴이 멋지게 노래를 불렀다. 후에 알았지만 우리라나만 그런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가 온 도시에서 울려 퍼졌다. 심지어 사담 후세인도 휘트니의 노래가 좋아서 아랍어 버전으로 선거 운동 곡으로 사용했다.
아버지가 도착할 때까지 스피커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흘러나오는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들었다. 주인아저씨는 60대로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었고 레코드 가게 안에서 천천히 걷고 움직였다. 아직 할아버지는 아닌데 할아버지들이 입는 바둑판무늬의 조끼를 늘 입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팝에 대한 지식이 많았고 늘 팝을 틀었다. 어떤 날은 아버지가 오시는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가서 쪼그리고 앉아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운 좋게도 사마귀가 난 주인아저씨가 들어오라고 해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어 보라고 했다.
내가 초교시절에 마을의 통장 집에 가면 가구풍 전축이 있었는데 거기서 통장 집 아들내미와 음악을 듣곤 했다. 통장 집에 가면 꽤 많은 레코드가 있었다. 통장 아늘 내미의 누나가 대학생이라 시카고, 로보 같은 음악이 잔뜩 있었다. 우리는 바늘을 걸고 듣는 걸 좋아했다. 요즘 초등생인 나의 조카가 엔 마리의 노래에 빠져있는 것과 비슷할까.
제일 레코드 주인아저씨는 거의 4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꼼짝 않고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듣는 내가 신기했던지 곧잘 과자도 주고, 듣고 있는 팝이나 팝가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이야기는 린다 론스테드와 아론 네빌의 이야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대체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알까 싶지만 관심이 있는 분야는 어떻게든 귀에 들어오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일 레코드사는 나의 단골집이 되었고 덕분에 거기서 어린 시절에 구입한 카세트테이프를 아직도 듣고 있다. 이건 무척 신기하고 고무되는 일이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회식을 하며 기분 좋게 술이 취하면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틀어 달라고 했다. 그럼 우리 네 가족은 소중한 저녁 시간에 티브이를 보지 않고 앉아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들었다. 드라마니, 뉴스니 오직 티브이를 통해서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였지만 어쩐지 오래된 석상처럼 앉아서 우리는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들었다.
휘트니 휴스턴의 앨범을 구입하고는 수업 시간 빼고는 노래를 들었다. 가방에는 늘 여분의 건전지가 있어야 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만큼 힘든 것이 없는데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꽉 움켜잡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다니. 내가 만약 흑인이고, 거리에서 흑인은 늘 핍박당하고 놀림당하고, 커서 취직을 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일자리는 없고 청소를 하거나 잡일을 해야만 하고. 그런데 교회에 가면 작은 어린 흑인 여자아이가 영혼을 건드리는 목소리로 가스펠송을 부르는 걸 듣는다면 어떻게든 이 힘든 시기를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휘트니 휴스턴의 다큐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남편의 폭력과 마약으로 점점 망가져가는, 엉망으로 변해가는 휘트니의 모습을 보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어제 방구석 1열에서 휘트니 휴스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유영석도 나와서 그녀에 대한,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영화 보디가드를 제작하고 주연을 한 케빈 코스트너가 휘트니의 장례식에서 연설을 했다. 케빈 코스트너는 휘트니에게 연기 수업을 받지 말고 있는 그대로 와서 연기를 해달라고 했다. 억지로 연기를 배워서 할 필요가 없다, 너의 있는 그 모습으로 그대로 화면에 담길 것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투어를 하고 있었는데 케빈 코스트너는 그녀를 위해 일 년을 기다린 끝에 보드가드의 촬영에 들어갔다.
영화 속에는 휘트니의 노래가 잔뜩 나온다. 마법의 손 데이비드 포스터가 아이 윌 올웨이즈 러브 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처음에 휘트니의 그 목소리로 무반주로 하기로 했어요, 모두가 조금 망설였지만 우리에겐 자신이 있었죠. 그리고 중간에 잠깐 멈춥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휘트니가 거기에 맞춰 노래를 불러요. 이건 정말 기적입니다.
휘트니 휴스턴은 슈퍼볼 경기에서 국가를 불렀다. 거기서 박자를 바꿔서 부르기로 하고 연습을 했다. 국가의 음을 건드린다는 건 무모하기도 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죠. 휘트니는 그렇게 연습을 하고 슈퍼볼 경기에서 국가를 부르는데 남의 나라 국가임에도 듣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아이러니하게도 휘트니가 부른 국가는 빌보드 20위까지 하게 된다. 그랬던 휘트니 휴스턴이 말도 안 되는 나이 42살에 죽고 만다. 욕조에서 익사된 채로.
영화 ‘휘트니’를 보면 휘트니 휴스턴의 모습을 카메라로 들이대는 방식이 아니라 휘트니를 알고 지냈던, 휘트니와 가장 가까웠던 주위의 사람들, 가족 내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휘트니의 성장과 나락을 보여준다. 휘트니는 음악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씨씨 휴스턴으로 가수였다. 어머니는 가스펠의 대모라고 불리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백보컬이었다. 이모가 디온 워익이다. 엄청난 음악 집안에서 태어난 휘트니는 엄마의 공연에서 코러스를 하며 자랐다. 엄마는 가수로써 인기가 그다지 없어서 노래를 잘 부르는 휘트니를 하드 트레이닝시킨다. 그렇게 탄탄하게 노래에 대한 교육을 받은 휘트니가 스무 살, 공식 첫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무대가 무섭고 떨리기도 할 법 한데 휘트니는 맑고 깨끗한 고음을 시원하게 뽑아내며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바닷가의 한 구석에서 휘트니의 음악을 들으며 이 작은 곳에서 당신의 노래를 듣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앞으로도 노래를 많이 불러 주세요.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휘트니 휴스턴이 죽고 난 후 3년 뒤에 그녀의 딸이 22살에 엄마와 똑같이 약에 중독되어 욕조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지만 뇌사상태에 이르렀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곳에서는 약 같은 거 하지 말고 딸과 함께 행복하기를. 케빈 코스트너는 휘트니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눈물을 닦고 슬픔을 멈추고 가능하면 오랫동안 휘트니가 남긴 달콤한 기적을 기억합시다. 나는 한때 당신의 보디가드였지만 당신은 너무 빨리 가버렸습니다. 하지만 천국으로 가는 길에는 천사들이 보디가드가 되어 줄 것이며 신 앞에서 노래할 때도 당신은 충분히 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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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미국 국가를 부른 휘트니 휴스턴. 기존의 4분의 3박자의 국가를 4분의 4박자로 편곡을 했다. 그래서 더 의미적으로 다가올 수 있게 바꾸었다. 가스펠 풍으로 불러 근엄하기만 한 국가의 분위기를 다르게 불렀다. 휘트니의 시원한 고음과 애드리브로 국가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이후의 국가를 부르는 여가수들은 이 버전을 참고하고 있다고 한다. 그 노래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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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곡이 되어 버린 i will always love you의 조회수가 무려 11억 뷰가 되었다. 원곡을 부른 돌리 파튼은 라디오에서 휘트니가 부르는 자신의 노래를 듣자마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이 노래는 휘트니의 것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