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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21. 2022

생라면

먹는 맛이 좋지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수업시간에 꼭 손을 들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는 놈이 있었다. 그 녀석은 수업시간에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아서 볼일을 보면서 생라면을 부셔 먹었다. 그래서 그 녀석 별명이 멀티였다. 야이 새끼야 왜 똥 싸면서 생라면을 먹고 그래 더럽게.


그 녀석은 모두가 수업을 들을 때 혼자서 자유를 느끼는 순간이 바로 변기에 앉아서 생라면을 먹는 순간이라고 했다. 더럽다고 하지만 그저 따로 할 뿐이지 누구나 다 똥 싸고 밥 먹잖아. 나는 그걸 동시에 하는 것뿐이야. 동시에 먹으면 시간도 절약되고 말이지. 게다가 묘한 쾌감 같은 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런 변태 새끼. 그 녀석은 변태 새끼라는 말을 들어도 낄낄거리며 너도 한 번 그런 쾌감을 느껴봐라 중독되면 계속하게 돼.


그 녀석은 합기도 3단으로 운동을 아주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몸도 좋고 운동이라면 다 잘하는 그런 부류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겁이 참 많았다. 사람은 겁내지 않았는데 귀신같은 초자연, 초현실 같은 것에 겁을 먹었다.


자율학습시간에 녀석이  자리 앞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녀석에게 호러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 가출해서 바닷가의  여인숙에서  방에 지내게  여자의 이야기. 물론  지어내서 했다. 폭우가 내려 숙박시설이 만실이어서 비가 그칠 때까지  여자와 작은 여인숙의  방에 잠시 같이 있게 되었다.


그 여자는 큰 가방을 가지고 다녔는데 여자가 음료를 사러 밖으로 나간 사이에 같이 가출을 한 친구 중에 한 명이 가방을 열었는데 큰 비닐봉지가 튀어나왔다. 봉지를 푸니 이상한 썩은 피 냄새가 방안에 확 퍼졌다. 비닐 속에는 아기의 시신이 토막이 나 있었다.


그때 그 녀석이 너무 놀란 나머지 자율학습 시간이었는데 으악 하며 소리를 지르더니 의자에서 바닥으로 넘어진 것이다. 물론 그때 내가 웍 하며 점프 스퀘어를 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놀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덕분에 당직인 물리에게 들켜 복도에서 벌을 섰다. 그리고 그 녀석이 놀라면서 내 팔을 얼마나 세게 꽉 잡았던지 멍이 들었다.


벌을 서면서도 바지 주머니가 약간 볼록 한 것이 비닐봉지 소리가 났다. 똥 싸면서 먹다 남은 생라면이었다.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생라면을 꺼내서 물리에게 들키기 잔에 재빠르게 입에 넣고 녹여 먹었다. 극한의 긴장으로 먹는 생라면은 꽤나 스릴 있는 맛이었다.


생라면 참 좋아했던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겠지. 며칠 전에 오랜만에 생라면을 뿌셔 먹었다. 그 녀석 생각이 확 났다. 생라면은 우걱우걱 씹어먹는 맛도 있지만 입에서 살살 녹여 먹는 맛 또한 좋다. 녹여 먹으려면 일단 환경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 그저 무방비 상태인 곳 - 집이나, 길거리, 사무실 같은 방해가 없는 곳에서 먹는 생라면은 그저 씹어 먹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교 수업시간이나, 자율학습을 할 때는 소리를 내며 씹어 먹을 수 없다. 살살 녹여 먹어야 한다. 스프가 침에 의해 녹으면서 입 안에 있는 생라면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꽤나 맛도 좋다. 생라면을 입 안에서 녹여 먹는 건 극장이 최고였다. 특히 예전에 극장 안에서 파는 팝콘이나 음료만 반입되는 시기에 생라면은 극장 안에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래서 팝콘 통에 생라면을 뿌셔 넣고 음료 대신 거기에 맥주를 부어서 맨 뒷자리 맨 구석 자리에서 생라면을 살살 녹여 먹으며 맥주를 홀짝거리고 영화를 보면 아주 재미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재미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스킬이 쌓이면 일반 라면에서 짜파게티로 넘어가게 된다. 짜파게티로 생라면으로 먹는 맛이 참 좋다.


생라면으로 라면을 먹으면 스프가 남는다. 스프는 마요네즈처럼 모든 음식에 다 잘 어울린다. 그냥 밥 위에 뿌려 먹어도 되고, 빵에 뿌려 먹어도 맛있다. 대학 때 빙 둘러앉아 술을 마실 때 안주가 떨어지면 과자 대신 어김없이 생라면이었다. 처음에는 에이 안주가 이게 뭐야 하지만 금방 동이 난다.


생라면을 오물오물 먹고 있으면 예전으로 잠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생라면은 어른이 되면 잘 먹지 않는다. 맥주 안주에 생라면이 좋은데 안주 머 먹을래?라고 묻기에 생라면이라고 말하면 대체로 에이, 라는 반응이다. 고요한 밤에 싸구려 와인을 홀짝이며 생라면을 우두둑 씹어 먹는 소리가 있는데 그 소리가 적막 사이의 틈을 파고들어 리듬을 탄다.


생각해보면 주위가 온통 적막 속에 있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바닷가에서 책을 좀 읽었다. 8월이 되고 모처럼 해가 쨍쨍하게 떴다. 8월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오락가락하거나 날씨가 애꿎었다. 습도가 없어서 해가 떠 있으면 쨍하다.


맑고 뜨거운 태양빛을 받을 수 있다. 바닷가에는 다른 소음을 들리지 않고 잔잔한 파도 소리와 갈매기가 우는 소리만 들린다. 이런 날 책을 좀 읽으면 집중이 잘 된다. 소설 속에 퐁당 빠져버린 것 같다. 옆에 생라면이 있었다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선곡은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https://youtu.be/gZr0Ryd4W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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