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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Sep 09. 2022

명절 연휴

가 또 돌아왔다


연휴에도 조깅을
하늘이 색을 갈아입는 시간

명절이 다가오면 일주일 내내 토요일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추석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런 기분은 어릴 때나 나이가 들어도 거의 변하지 않는 거 같다. 어른이 되어서 명절이 되면 어린 시절만큼 풍족한 마음을 느끼기보다 불안하고 불편한 시간이 틈을 벌리고 들어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석이 다가오면 그 전 주는 평일인데도 늘 토요일 같은 기분이 든다. 토요일이란 일요일 같지도 않고 평일 같지도 않으니까.


어릴 때 추석은 지금처럼 이렇게 덥지 않았다. 그랬다고 생각된다. 추석이 되면 아버지는 나에게 꼭 청바지를 사주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린다고 아버지는 그랬다. 새 청바지를 입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추석이 오면 동네 친구들은 전부 어딘가로 갔지만 우리는 집에 머물렀다. 그래서 추석 전날이나 전전날에 청바지를 입고 친구들 앞에 나서고 싶은 그 마음이 어느 순간 퇴색하더니 기다리던 전화가 뚝 끊기듯 사라져 버렸다. 바야흐로 어른이 된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건 일상을 12로 나뉜다면 6과 5 사이에는 미묘한 불행과 덜 행복함과 고민과 불안이 불순물처럼 껴 있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불순물의 이물감을 매일 느낀다. 눈으로 보이는 숫자와 숫자 그 사이에 겁이 나는 수치가 숨어 있는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게 어른이다. 그래서 명절이라고 해서 마냥 기뻐하고 새 옷을 입고 자랑하며 다닐 수는 없다. 어른의 세계란 생각보다 훨씬 고고(높고 오래된)한 관념이 틈입해있다.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사연을 보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른이고, 사연의 대부분은 명절이라 힘들고 괴로운 이야기가 차지한다. 재미있는 건 즐겁고 행복한 사연은 짧게 맨트가 이어지는데,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연은 길게 맨트가 이어지고 뒤에 이런저런 위로의 맨트까지 덤으로 듣게 된다. 명절이라 쉬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대로 힘들고, 내내 쉬는 사람들은 도로 위의 정체와 누구의 부모님 집에 먼저 가느냐부터 시작된 논쟁은 명절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어제 한 사연이 있었는데(라디오는 아니었다) 이번에 결혼하게 되어서 처음 명절을 맞이한 신부의 사연이었다. 결혼 전에 신랑이 될 남자 친구에게, 자기네 집에는 명절에 제사 지내?라고 물으니, 아니 제사 안 지내.라고 해서 처음 명절이라 시댁과 처가댁에 들렀다가 호캉스를 가는 게 어떠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남편이 뭐래는 거냐며 추석에 차례 지내는데 음식 해야지 호캉스는 무슨.라고 하는 것이다. 신부는 화가 나서 내가 결혼 전에 물었을 때 왜 제사 안 지낸다고 했잖아,라고 물으니 남편이 제사는 안 지내지, 명절이니까 차례를 지내지. 그니까 음식을 해야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뭐 이런 내용의 사연으로 패널들이 각각의 의견을 내고 죽네사네, 하는 게 지금의 명절 분위기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질한 남녀로 보일지 몰라도 어른의 세계란 생각보다 복잡하고 생각만큼 단순해져 버렸다.


라디오 하니까 라디오 디제이들도 명절에 일을 할 수 있어서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방송가의 일이라는 게 명절 기간에는 특별한 날로 지정을 해서 쉬지 못한다. 그래서 오히려 더 좋아하는 디제이들도 있지 않을까 싶다. 멘트를 할 때 말속의 리듬이나 분위기를 보면 대놓고 나는 명절 기간에 라디오를 할 수 있어서 좋아 죽어요,라고 하지 않아서 그렇지 분위기는 그렇다.


디제이 하니까 좀 쓸데없는 이야기로, 이제 라디오 디제이는 전문 디제이가 디제이를 하는 경우가 없다.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예전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나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김광한의 추억의 골든팝스처럼 전문 디제이가 라디오를 하지 않고 가수나 연예인들이 디제이를 한다. 그래서 뭐랄까 재미는 더 있어졌다. 이들도 아슬아슬하니까 6개월마다 평가를 해서 다른 디제이로 갈아치우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전문 디제이보다 연예인이 대중에게는 더 알려졌으니까 라디오 관계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렇게 흘러가게 방향을 잡았다. 그래야 청취율이나 실시간 반응이나 이런 것들로 살아남아야 하니까. 역시 어른들의 세계는 눈으로 보이는 그 세계 너머의 세계가 있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나는 실시간으로 들어보지 못했지만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유튜브로 들어보면 80년대 감성이 물씬 난다. 밤 11시부터 자정까지 한국의 청춘 내지는 감성이 풍만한 사람들은 라디오를 끼고 매일 밤을 음악의 바닷속에서 춤을 추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정성스럽게 적은 엽서를 보내고 일주일 동안 나의 사연이 나올까 조마조마하며 매일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었다. 조용한 이 밤을 음악과 함께 즐기겠다며 사연이 이종환 디제이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다.


[소중한 내 마음 당신께 드립니다.

하늘처럼 파랗고, 진실한 사랑의 눈동자.

깊은 곳에 있는 내 사랑은,

아름다운 얼굴은 나를 길을 잃게 했습니다.

나를 믿으십시오. 내 사랑을 믿으십시오.

당신의 모든 걸 열망하는 내 사랑을 믿으십시오.

캐니 로저스, 조지 해리슨 그 외 여러 가수들의 노래를 신청해 주셨는데 그중에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를 골랐습니다. 브리짓 오브 트레블 워터,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가을을 수놓는 디제이의 맨트와 밤하늘에 퍼지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가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덜 불안하게 하는 디제이의 중량감 있는 목소리와 멘트.


이제 우리 집에서는 명절에 음식을 하지 않는다. 몇 해에 걸쳐 타협을 한 결과 이제 명절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르신들의 고집이나 생각을 바꾸는 아주, 너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정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유교문화에서 시작된 제사상 차리기는 잘못된 것이 많다. 거침없는 세계사의 썬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걸 잘 말해주고 있다. 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도 예전부터 그런 걸 주장했다. 홍동백서는 일본에서 건너왔고 유교문화에서는 간소함과 무소유가 원칙이라 지금도 퇴계 이황 종갓집에서 지내는 제사상에는 밥상과 술이 전부다. 전을 부치고 하는 것도 원래 없었다. 기름을 먹어야 했던 스님들이 명절에 전을 굽고 하던 불교식 음식 만들기가 명절 음식으로 들어왔다. 유교문화에서는 기름 음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명절에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 건 절대 권력자가 오래전에 명절에는 배부르게 먹자며 전통시장을 살리는 계기도 되어서 그날은 대목으로 불리게 되며 점점 퍼져나갔다. 어르신들은 이게 마치 정말 조상들이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한 번 입력된 프로그램을 바꾼다는 건 너무나 힘들 일이다. 무엇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언젠가부터 추석은 아직 여름의 더운 기운이 빠지지 않았는데 맞이하게 되었다. 더운 날 불판 앞에서 그 많은 음식을 지지고 볶고 굽는 행위는 너무 이상하다.


썬킴의 말에 따르면 홍동백서가 왜 나왔냐 하면 돈을 주고 족보를 사버린 노비들이 좀 더 있어 보이기 위해 상차림을 거하게 차리게 되었는데, 일본 전통에 1180년에 원평 전쟁이라고 해서 원 씨와 평 씨, 두 집안의 전쟁이 있었다. 원 씨는 흰색 깃발, 평 씨는 붉은 깃발. 두 집안에 싸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일본의 모든 경쟁 구조를 홍백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 잔재를 알 수 있는 문화가 홍백가합전이다. 이걸 일제강점기 때 누군가 튀어 보이려고 제사상차림에 만든 게 홍동백서라고 한다. 우리 전통, 대한민국 전통에는 홍, 백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성균관에서 얘기한 것 중 결정적인 것은 유교 제사 음식은 남자가 만들었다고 한다. 100% 남자가 만들었다. 유교문화에서 왜 제사음식을 남자가 만들었는지 예전에도 한 번 올렸던 글을 링크해본다.


내가 사는 곳은 바닷가인데 예쁜 카페들이 많다. 어느 카페에서는 여기 테라스에 앉아서 일출을 보면 아주 아름답다고 해 놨다. 과연 예쁜 자리이기도 하고, 앉아서 저기 먼바다의 수평선 너머로 오메가를 뿜으며 이글거리는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데 일출은 아파트에서 봐도 아름답다. 밤을 새우고 찌뿌듯한 몸으로 길거리를 걷다가 보는 일출도 아름답다. 변기에 앉아서 창문으로 보는 일출도, 만취에 보는 일출도, 다리 위에서 보는 일출도 다 아름답다. 일출이란 어디서 보든 아름답다. 단지 일출은 살면서 몇 번 보지 않기에 어쩌다 보는 일출은 몹시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걸 일탈이라고 부른다. 일상에서 매일 일출을 본다면 아름답지만 일탈 속에서 보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를 것이다. 에르메스를 구입할 때의 마음과 일상 속으로 들어온 에르메스를 대하는 마음이 같을 수는 없다.


명절이 일탈이라면 아름답고 행복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어른들이 많아졌다. 어찌 되었던 연휴가 시작되었다. 일출은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일출이 아름다운 건 매일 보지 않기 때문이다.


https://youtu.be/nvF5imxS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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