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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27. 2022

By the Book

하루키 뉴욕타임스 인터뷰

뉴욕 타임스 인터뷰 ‘바이 더 북’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세이가 이번에 미국에서 출간된 기념으로 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여러 인터뷰가 오고 갔는데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하루키는 마지막으로 읽은 좋은 책으로 피츠제럴드의 ‘마지막 대군’이라고 했다. 이 소설은 하루키가 일본어로 번역한 책이 올해 초에 출간도 되었다.


번역을 하면서 이 소설이 새삼 얼마나 놀라운지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하루키는 헤밍웨이보다 피츠제럴드를 작가로서 더 좋아한다. 고 생각한다.


헤밍웨이가 더 뛰어난 문장을 지녔을지 몰라도 작가로서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자신의 고통을 깨물면서 마지막까지 글을 쓴 피츠제럴드에게 애정을 쏟아 냈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결국 자신이 패배했다고 느꼈던 건지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에 비해 나락으로 떨어질 때까지 떨어졌지만 마지막까지 펜을 잡고 글을 쓰다 죽은 피츠제럴드에게 한껏 애정을 쏟고 있음을 그간의 많은 에세이에서 크고 작게 언급을 했다.


또 하루키는 인터뷰에서 최근 들어 처음으로 읽은 고전 소설은 도스토옙의 ‘A Raw Yuth’라고 했고 아직 읽어 보지 않은 그의 작품이 몇 더 있고, 발자크도 그렇다고 했다. 커피 중독자 발자크는 김영하도, 천문학자 심채경도 아주 좋아한다. 그런 것 같다.


하루키는 또 그리스에 있을 때, 햇볕이 잘 드는 테라스에서 동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존 파울즈의 ’The Magus’를 읽었을 때가 가장 마음에 드는 독서 경험이라고 했다. 그때 살았던 섬이 하루키의 소설의 배경이 되기도 해서 더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하루키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모든 소설을 번역했고, 레이먼드 카버는 모든 작품 - 단편, 시, 에세이 전부를 번역했지만 헤밍웨이의 소설은 한 편도 번역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 또 원작자의 글을 접하며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 외 여러 인터뷰가 오고 갔다. 재미있는 건 레코드 컬렉션은 신중하고 정성을 다해서 정리를 하지만 책은 마구잡이로 쌓아두는 편이라, 문득 찾고 싶은 책이 있다면 그 책을 찾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책은 결국 찾지 못하고 포기하기도 한단다. 여기까지가 인터뷰의 소소한 소식이다. 


하루키는 헤밍웨이 보다는 피츠 제럴드를 훨씬 좋아한다. 후에 그의 손녀인가, 딸인가? 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또 그 일화를 에세이에 올리기도 했다. 하루키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과는 친구를 해도 된다고 할 만큼 그 소설을 끔찍이도 좋아한다. 그건 아마 김영하 소설가도 그럴 것이다. 저짝 일본에는 하루키가 번역을, 우리는 김영하 소설가가 번역을 했다. 이 소설로 인해 풍부한 직유의 사용으로 문장이 한껏 아름다워졌다고 한다.


나는 사실 위대한 개츠비는 그렇게 재미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한 번 달랑 읽었다. 그러니 나 같은 놈과는 친구가 되지 않는 편이 좋겠지요.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보다는 피츠 제럴드의 이야기가 훨씬 좋았다.


피츠 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자신을, 자아를 반으로 나누었다고 생각된다. 반은 데이지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오직 의지만을 지니는 개츠비의 모습과 나머지 반은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는 닉의 모습으로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보면 제일 첫 장에 ‘다시 젤다에게’로 포문을 연다. 1920년대 피츠제럴드는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글쟁이였다. 출판사들은 그의 글을 내고 싶어 안달복달했다. 피츠제럴드는 그런 미국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피츠제럴드는 생긴 것도 아주 잘 생겼다. 육군 소위로 장교복을 입고 있는 피츠제럴드의 외모는 누구나 반할 만큼 멋있었다. 영화 속 디캐프리오의 개츠비가 데이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1차 대전이 끝나고 군복을 벗어버리자 피츠제럴드는 한낱 볼품없는 청년의 모습과 같았다.


광고 회사를 다니면서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성적 하락으로 중퇴를 하고 광고 문구를 만들면서 꾸준하게 소설을 썼다. 하지만 그의 글은 출판사에서 언제나 퇴짜를 맞았다. 그런 생활을 하던 그의 눈앞에 일생에 한번 사랑에 빠질만한 여자가 나타났으니, 그 여자가 바로 조지아 주와 앨라배마 주에서 가장 미인이었던 ‘젤다 세이’였다.


젤다는 발랄했고 기가 세고 승부욕이 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 뻤. 다. 젤다도 피츠제럴드를 사랑했지만 가난한 남자와 사는 것은 그녀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명문가 집안의 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고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 젤다는 가난한 삶을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는 젤다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피츠제럴드가 그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글밖에 없었다. 젤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런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서 피츠제럴드는 세상이 놀랄만한 글을 써야 했다.


피츠제럴드는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젤다를 얻기 위해 피츠제럴드는 글을 썼다. 젤다는 피츠제럴드를 사랑했지만 별 볼 일 없는 피츠제럴드와의 약혼을 파기한다. 그만큼 젤다는 냉정하고 현실에 가까운 여자였다. 피츠제럴드는 마음이 아팠고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나가는 두려움에 무서웠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바로 앞에 있는데 가난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니. 피츠제럴드는 그래서 죽어라 글을 썼다.


압박감에 글을 써야 하는 피츠제럴드의 기분은 어땠을까. 출판사에서 갈구하는 기분 좋은 압박감도 아니며 대중이 원하는 비바람 같은 압박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이 자신에게 바늘로 찌르는 압박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싸워서 이겨야 하고 넘어야 하는 존재로 말을 많이 한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정말 그렇게 이겨야 넘어야 하는 존재일까. 자신은 자신의 에고를 보듬어 주고 사랑해주면 우리가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일까.


고통 끝에 펴낸 자신의 첫 소설 ‘This side of paradise’ 덕분에 젤다가 출판 일주일 후에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위대한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펴낸다. 당시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이 원래 ' 개츠비'였는데 '위대한'을 삽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젤다와 출판사의 권유로 '위대한'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 하나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젤다가 옆에 있기에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다. 아마도 굳게, 무엇보다 사랑하는 젤다의 얼굴을 매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모든 것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마치 데이지를 바라보는 개츠비처럼 말이다.


그렇게 펴낸 ‘위대한 개츠비’는 실패에 가까웠다. 팔리지 않았다. 피츠제럴드는 경제적 궁핍 속에 시달려야 했지만 2차 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군인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붐이 일어났다. 바로 군인들 자신의 모습이 개츠비에 투사되었기 때문이었다. 1925년에 2만 부에 거친 책은 군인들 덕분에 15만 부가 넘어 팔리게 된다. 비평가들은 개츠비에 대해서 호평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50년대의 미국에 있는 고교에서는 필독 독서로 자리를 잡았고 이후 전 세계가 사랑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피츠제럴드는 이제 부러울 것 없는 생활과 젤다를 완전히 자신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 점화가 된 글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였다. 피츠제럴드는 젤다가 원하는 파티를 매일 열었고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젤다가 원하면 그는 다 들어주었다. 매일 파티를 즐기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젤다가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두려웠을 것이다.


젤다와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개츠비로 성공을 거두자 두 사람은 명실 상부한 뉴욕의 셀러브리티 커플로 알려진다. 톡톡 튀고 독립심이 강하고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그녀를 당시의 미디어와 사람들은 추앙했고 사랑했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삶을 더욱 사랑했고 옆에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가 늘 지켜봐 주었다. 도취될 수밖에 없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여자가 늘 웃고 있었다. 부족함이 없었다.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가 빠져 들었고 연일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여 술과 문학과 재즈를 즐겼다. 주위에는 돈이 흘러넘쳤고 옆에는 명성이 있는 자신의 남편, 피츠제럴드가 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이 모든 생활이.


파티가 지속되고 개츠비 이후에 개츠비만한 글이 나오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사람이 피츠제럴드의 절친, 어니스트 헤밍웨이였다. 헤밍웨이는 파리의 한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피츠제럴드를 찾아간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술잔을 한 손에 뒤고 상류층의 복장을 하고 포마드로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피츠제럴드를 찾은 헤밍웨이는 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봐 스콧. 요즘 괜찮은가?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보게 어니스트. 잘 보게. 이것이 삶이라네.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자 한잔하고 가게나.


아마도 이런 대화가 오고 갔을 것이다. 이런 장면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잘 나온다.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가 왔음에도 예전 같지 않았다. 변해있었던 것이다. 헤밍웨이는 후에 그가 이렇게 망가진 것은 그의 옆에 있는 젤다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가 그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피츠제럴드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든 들어주고 싶었다. 피츠제럴드와 젤다는 돈을 물 쓰듯 썼다. 술을 마시면 언제나 만취였고 호텔의 분수에 뛰어들었고 신문의 일 면을 장식했다. 연일 열리는 파티와 파티 사이에 천재적으로 써 내려간 단편은 거액으로 출판사에 팔려 나갔다. 피츠 제럴드의 이 모든 행동과 삶은 오로지 젤다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젤다와 개츠비 속의 데이지를 욕하지만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한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의 눈과 촉은 젤다를 향해 있었고 그녀가 움직이면 그의 촉도 같이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세 시간이 걸리는 곳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녀가 바라는 옷이 있다면 어떻게든 구해서 선물했을 것이다. 투정을 부리면 받아줬을 것이고 눈물을 흘리면 안아줬고 매일 밤마다 그녀의 귀에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젤다의 사진을 보면 헤어스타일이 독특했고 의상도 화려했다. 당시에 가장 핫한 인물임을 나타낸다. 요즘도 하기 힘든 머릿결의 웨이브라든가 스타일은 당시 최고였고, 피츠제럴드의 열렬한 응원을 받고 있었다. 부족함 없이 돈을 쓸 수 있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원하고 바라는 삶일지도 모른다.


부족한 것 없는 집안에서 철없이 자란 여자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하지만 죽을 때까지 철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대로 꽤 멋지고 괜찮은 삶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많은 돈을 거머쥐며 부족함 없이 살기를 원하며 자식에게는 좀 더 나은, 보다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고 싶어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현실적인 젤다와 데이지에게 욕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젤다와 피츠제럴드의 방탕하고 호화로운 생활은 십 년 만에 비극을 맞이한다. 미국은 29년에 대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피츠제럴드의 소설도 파국을 맞이하며 끝을 맺게 된다. 대신 미국의 문학적인 영웅을 새롭게 맞이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였다.


문학의 사조가 바뀌었고 피트제럴드의 글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헤밍웨이가 글을 통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며 총구를 입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것에 비한다면 피츠제럴드는 어두운 곳에서 죽을 때까지 글을 썼다. 하루키는 이 부분을 몹시 높이 사고 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피츠제럴드는 진정한 글쟁이가 아닐까 싶다.


젤다는 몰락한 이후 자신의 퇴락해가는 모습에서 우울증에 시달렸다. 상승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이 있는 법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아름다운 젤다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이 보였고 머리카락은 힘이 없어서 더 이상 이전처럼 예쁘게 말리지도 않았다.


늙어가고 힘 빠진 모습에서 우울해지는 여자가 어디 젤다뿐이겠는가. 사람들은 아름답게 늙어가기를 바라지만 ‘늙다’라는 동사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가 ‘아름다운’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자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예쁘게 나이를 먹었네, 곱게 늙었네, 같은 말을 하지 말고 ‘늙었네’와 ‘나이 먹었네’를 빼야 한다.


젤다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실력을 살려 책도 펴냈지만 출판사는 다른 곳만 쳐다볼 뿐이었다. 젤다가 우울증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과정을 피츠제럴드가 소설에 그대로 사용하고, 그 사실로 인해 젤다의 병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깊은 배신감을 받았다. 젤다의 일기와 편지들은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 그대로 남아있을 뿐, 젤다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결락과 우울은 너무나 깊고 컸다. 자신을 추앙했던 사람들이 길거리를 지나가면 수군거렸고 손가락 짓을 했다.


저기 젤다가 지나가!

저 여자 매일 밤새도록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진탕 마시고 담배도 지폐에 불을 붙여 피웠대!

그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 좀 도와주지 말이야!

이젠 볼품없는 얼굴이 되었군!

남편의 글도 이젠 한물갔대 나 봐!

남편은 젤다의 퇴락해가는 이야기를 소설에 섰대! 불쌍하구만!


이런 수군거림을 젤다는 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정신병원으로 땅만 보며 걸어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면 무섭도록 잔인해진다.


부흥기가 있었지만 젤다가 피츠제럴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데이지처럼 톰 뷰캐넌 같은 남편을 만나서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더라도 수면 위에서 평탄하게 살아갔을까. 1940년에 피츠제럴드가 죽고 정신병원을 오가던 젤다는 아주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정신병원의 화재로 인해 3월의 봄날에 그녀는 자신의 남편 곁으로 가버린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그린라이트를 바라보며 데이지를 생각한다. 5년 만에 나타난 개츠비는 멋있고 유능한 갑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개츠비는 5년 만에 성공의 가도에 올랐지만 그 5년 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피츠제럴드는 개츠비가 자신을 투자한 5년을 어떤 식으로 투사했을까. 무일푼이었던 인간이 5년 만에 성공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개츠비는 5년 동안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했을 것이다. 오로지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서 개츠비는 어떤 부분에서는 서슴없이 행동했을 일들.


데이지를 사랑하는 자신처럼, 데이지 역시 자신을 자신만큼 사랑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개츠비. 개츠비는 5년 동안 겪은 일들로 인해 자신의 앞을 막는 것을 광기로 밀어 버린다. 방해가 되는 것이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5년 동안 개츠비의 머릿속에는 사랑을 속삭였던 데이지의 모습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개츠비는 데이지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면서도 개츠비는 처절하게 데이지를 기다린다. 마지막 수영장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휑한 모습이 마치 어셔가의 몰락의 첫 장면을 떠올릴 만큼 황망하다.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받은 편지와 사진을 앨범 속에 포트폴리오로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런 모든 모습을 꾸준하게 바라보는 이, 개츠비의 유일한 친구 닉 캐러웨이가 있었다. 닉은 마지막에 타이핑 한 개츠비라는 글자 위에 손글씨로 ‘위대한’을 썼다. 그곳엔 스콧 피츠제럴드의 모습이 있었다.


지금 현실이 아름다워도 늘 불만스럽다. 현재라는 것이 그렇다. 만족을 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의 이 별 볼일 없는 모습도 과거가 되고 먼 미래에서 우리를 본다면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일까.



그래서 오늘의 선곡은 디캐프리오 버전의 위대한 개츠비 ost, Lana Del Rey의 Young And Beautiful https://youtu.be/W5dLmC7GN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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