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티브이에 겨울연가가 하기에 얼떨결에 몇 화를 보게 되었다. 커피 프린스 1호점과 몇 년 차이가 나지 않는데 겨울연가는 뭔가 촌스럽다. 대사도, 연기도 어색하다. 오히려 80년대나 그 이전의 드라마나 영화가 어색하지 않고 세련된 것 같다.
겨울연가에서 주인공들이 갈등을 빚고 난 후 대부분 내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며 자기 비하가 심하다. 나는 겨울연가를 실시간으로 보지 못했고 본 적이 없어도 워낙 유명세를 탄 드라마이기에 대충 내용은 알지만 주인공들이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데 그 대상자가 자기 옆의 애인이 아닌 다른 이성에게 향하고 있어서 전부 끙끙댄다.
겨울연가가 방영되고 10년인가 지나서 남이섬에 갔는데 준상이와 유진이의 러브러브 로맨스 촬영 장소가 아직 있었고, 사람들이 프린트된 준상이와 유진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마 그들 대부분이 일본인들 같았는데 드라마가 얼마나 유명세를 탔으면 10년이 지나도 촬영 장소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가을동화의 촬영지였던 한 폐교도 오랫동안 방문객들로 북적북적했다. 오래도 우려먹었다.
겨울연가에 나오는 주인공들 중에서는 배용준이 제일 자연스럽게 연기를 한다. 나머지는, 요즘 연기자의 연기를 보다가(요컨대 글로리의 송혜교, 조연들의 미친 연기나 카지노의 민식이 형의 실제 같은 생활 쌍욕 퍼레이드) 겨울연가의 부자연스러운 주인공들의 연기를 보니 대학생들 졸업 작품을 보는 느낌이다.
겨울연가에서도 주인공들이 아닌 배우들은 생활연기를 잘한다. 권해효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생활에 밀착된 연기를 한다. 권해효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순간 진짜 저 등신 같은 인간, 저 지질하고 쩨쩨한 인간일지도 모를 정도의 연기를 한다. 권해효는 죽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이었는데 이번에 정준호가 위원장이 되면서 사퇴를 해버렸다. 방은진도 집행위원이었는데 나 안 할래 하며 내던졌다.
정준호는 독립영화, 예술영화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어어어무 먼데 전주시장이 떡 허니 그 자리에 정준호를 앉혔다고 한다. 상업영화에 나온 배우지만 집행위원장으로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래서 영화인들이 봉기를 들었다. 아무튼 이상하게 흘러가는 곳은 늘 여기저기에 있기 마련이다.
겨울연가에서 주인공들이 갈등을 빚으면서 낯빛이 어두워지며 대립을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에게게 최지우 얼굴은 너무 작아서 곧 소멸할 것만 같다. 마음은 딴 데 있는데 상혁이랑 같이 있으니 계속 땅혁아 왜 그래,를 외친다. 상혁이 역으로 나오는 박용하는 참 선하게 잘 생겼다. 죽은 박용하는 안타깝다. 뭔가를 이겨내고 계속 연기를 했으면 지금 찬란한 케이무비와 케이드라마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칠 텐데.
박용하가 죽었을 때 오열을 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소지섭이었다. 파릇파릇할 때 박용하와 토크 프로그램 같은 곳에 나와서 하나뿐인 친구라고 했다. 그런 친구가 죽고 난 후 소지섭은 오열하며 사진을 들고 장례를 치렀다. 소지섭은 51k라는 영화 배급사 대표로 있다. 51k에서 수입한 영화들은 메이저는 아니지만 아주 볼만하고 재미있는 영화들이 많다. 미드소마, 쁘띠 마망, 다가오는 것들 등 주로 예술 영화를 배급하는데 돈이 안 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소지섭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근래에 틸다 스윈튼 주연의 휴먼 보이스를 수입했는데, 아주 짤막한 단편영화로 보면 흥미롭다. http://51k.com/ 소간지 회사
겨울연가 한 회당 나오는 음악과 노래는 몇 곡일까. 끊임없이 삽입곡들이 나온다. 감독이 누구더라 봄여름겨울가을을 배경으로 드라마 한 편씩 만든 감독. 우리나라 좋은 곳을 샅샅이 뒤져 영상에 담아서 호평을 얻었다. 봄의 왈츠 때는 일본으로 가서 멋진 장면을 영상에 담기도 했다. 우연과 운명으로 사랑이 이어지는 스토리가 대부분이라 로맨스 만화만화적이라 요즘과는 거리가 좀 먼 것 같다.
윤석호 감독은 청춘물의 대가였다. 손지창, 이정재, 김민종이 만화에서 갖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3형제를 연기한 '느낌'이 시발점이었다. 얼굴도 몸도 성격도 다 다른 3형제가 인형 같은 동생 우희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청춘물이다. 주인공들의 친구들로 까만 콩 이본과 류시원, 이지은이 나왔다.
이지은은 김해경 선생, 이상의 이야기를 영화한 '금홍아 금홍아'에 금홍이로 출연했다. 금홍은 이상의 기괴함을 상쇄시켜 주는 어떤 뮤즈 같은 존재였다. 오래된 영화지만 지금 봐도 재미있다. 이상의 시와 글은 어렵지만 이상의 이야기는 영화든, 글이든 재미있고 흥미롭다. 이지은은 계속 잘 나가는 배우로 지낼 줄 알았지만 21년 3월에 홀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시인 이상에 관한 흥미 있는 기사 http://www.thevi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6
윤석호 감독은 그러다가 소식이 뜸 하더니 작년인가? 일본 배우들을 데리고 일본에서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 마음에 부는 바람이라고 스토리는 좀 빈약하지만 영상미는 아주 좋다. 첫사랑, 재회, 일본 최고의 풍경이 있는 홋카이도 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끈다.
겨울연가 8회인가? 질투에 눈이 먼 상혁이가 유진이를 납치하듯 데리고 호텔(이라 부르지만 방은 모텔 같은)에 집어던지고 오늘은 우리 둘만 생각해! 라며 이대근 흉내를 내며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 와중에 민형(준땅이, 배용준)에게 온 전화를 상혁이가 받아서 빡친다. 유진에게 화를 내다가 결국 침대에 눕혀 겁탈하려는데 유진이가 상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호텔을 빠져나온다. 달려 나오는 유진이는 호리호리 곧 쓰러질 것 같은 몸과 엉엉 울어 망가진 얼굴을 한 채 민형에게 가버린다. 아아 이 사랑을 향한 마음은 꼭 누군가를 애절하게 만든다.
유진이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아차 싶은 상혁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또 내가 미안해! 를 허공에 대고 외친다. 내가 잘 못 했 다! 도대체 이 드라마에서 안 미안한 사람은 누구야. 죄다 미안하다고만 하는 거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뭐가 미안한데?
내가 그냥 다 미안해!
오빤 그게 문제야, 뭐가 미안한 건데!
이런 남녀의 무한굴레가 떠오른다. 겨울연가에서 주인공들은 초반 잘 지내다가 갈등 이후 돌아가면서 미안해,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한 회당 미안하다 소리가 많을까 삽입곡이 많을까.
오래된 드라마를 보면 많은 것이 지금과 다르다. 의상, 메이크업, 자동차 등. 변하지 않는 것들로 보이는 건 건물은 한 이십 년 정도 지나도 지금과 큰 차이가 없지만-영화를 봐도 그렇다. 게 중에서는 휴대전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예 휴대전화가 없는 시기면 더 나은데 스마트폰 이전의 투지폰이 나오는 장면은 어쩐지 기묘하다. 겨울연가에서 유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여기에도 저기에도 마음을 똑띠 정하지 못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왔다 갔다 하며 우유부단하게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보다 못한 민형이(준상이)가 매너 있는 목소리로 행동 똑바로 하라고 한다.
그러다가 상혁이가 준비한 유열의 음악앨범 같은 야외 콘서트를 개최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회자 이자 노래를 부른 유열이 상혁이를 불러내 여기에서 중요한 발표를 한다며 유진이를 무대로 불러내 약혼자라 소개하고 다음 달에 결혼 발표를 해버린다. 처음 듣는 소리에도 유진이는 상혁이 얼굴을 한 번 쳐다볼 뿐이다. 요즘 같았으면 고구마 먹은 캐릭터라며 게시판에 폭격을 맞았을 텐데. 좋아 죽는 무대 위의 상혁이 얼굴을 보며, 소극적인 유진이를 두고 민형이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만다. 이후 어떻게 될까.
우연과 운명, 감성충만 겨울연가였다.
그럼 오늘의 선곡은 겨울연가 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 곡 '처음부터 지금까지' https://youtu.be/-50AQDZjzc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