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May 08. 2023

라면을 끓였는데 찌개가 되었다

짜파게티가 먹고 싶었는데



아침에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나오니 복도에 짜파게티 냄새가 퍼져있다. 어느 집에서 끓이는 것일까. 너무 냄새가 좋다. 이 냄새는 물을 찰방 하게 남겨서 스프를 넣고 팔팔 끓여서 짜장소스가 면 깊숙이 밴 짜파게티의 냄새다. 면이 타지 않고 졸아 들어서 입 안이 온통 짜장으로 물결을 이루는 그 냄새다. 짜파게티에는 김치가 필요하다지만 단무지가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오전에 짜파게티 생각을 뇌 속 깊이 각인을 한 후 저녁에 조깅을 하면서 오늘은 짜파게티를 먹으리 라는 일념으로 열심히 달렸다. 짜파게티는 집에 늘 한두 개는 있다. 나는 공복에 조깅을 한다. 뭔가를 먹고 조깅을 하면 당연하지만 먹은 음식이 다 소화가 되어 버리고 들어오면 또 배가 고프다.


공복에 조깅을 하는 것이 몸이 가볍고 뭐 그렇다. 어떻든 올해는 2월인가 하루 빼고는 매일 한두 시간 정도 달리며 걸으며, 그렇게 조깅을 했다. 조깅을 할 때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뇌를 텅 비우고 무의 상태로 조깅을 한다. 달리면서 뭔가를 떠올리고 무엇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이란 생각처럼 되는 게 아니라 멍 한 상태의 나의 뇌로 알아서 어떤 생각이 들어오기도 한다.


달리는데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게 짜파게티의 냄새였다. 그때부터 허기가 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보통은 공복이라도 조깅을 할 때 허기가 지는 일 따위는 없다. 그러나 오전에 나의 온몸을 떨리게 했던 이 죽일 놈의 짜파게티 냄새는 허기를 화악 몰고 왔다.


집으로 와서 샤워를 한 후 호기롭게 주방의 선반을 열었는데 늘 있던 짜파게티가 없었다. 이 허탈함이란. 순간이지만 마음의 공백이 엄청났다. 밖에 나가서 사 올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가 눈에 보이는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근래에 라면을 끓이면 라면자체의 맛이 좋아서 라면만 끓여 먹게 되었다. 몇 년 동안 라면을 끓여 먹으면 계속 그 안에 이것저것 넣어서 먹다 보니 라면 맛이 뭔지 알지 못하게 되어서 언젠가부터는 라면만 딱 끓여서 먹고 있었다.


그런데 먹다 남은 두부가 보이고, 양배추 찌끄러지가 보이고, 버섯이 보이기에 다 같이 집어넣고 울진표 고춧가루를 좀 넣어서 끓였다. 이렇게 라면을 끓여 먹지 않으리 했는데 결국 찌개가 되었다. 라면에 두부가 들어간 게 아니라 찌개에 라면사리를 넣은 것 같은 맛이 되었다.


정말 인생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네.

단무지도 없어 깍두기를 곁들여 먹었다.

밥도 말아먹었다.


짜파게티에서 이만 광년이나 멀어졌지만 라면은 늘, 언제나 왜 이렇게 맛있을까. 라면은 이상하지만 끓일 때 이것저것 집어넣어서 라면 맛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 같지만 라면 맛은 없어지지 않는다. 맛있다는 말이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모금 떠먹으면 마치 짬뽕 국물을 떠먹는 것 같은 맛도 들지만 끝은 라면 국물이다. 짜파게티가 먹고 싶었는데 먹다 보니 짜파게티의 생각이 싹 사라졌다.


찌개라면은 뜨거울 때 해치워야 한다. 호로록 면을 빨아들이고 국물을 한 모금 떠 마시고 뜨거운 두부를 프릅프릅 먹는다. 며칠 동안 비가 왔다. 비바람이 심했다. 풍랑 특보가 발효되고 외출 삼가라고 했다. 그래도 우산을 들고 조깅할 시간에 강변으로 나갔다. 이렇게 며칠 동안 비바람이 부는 건 장마기간을 제외하고 오랜만인 것 같다. 날도 추워서 우산을 들고 빨리 걷거나 달렸다. 아는 척은 못 하지만 늘 비슷한 시간에 나와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역시 우산을 들고 나와서 조깅을 하고 있다.


별거 아닌 일상의 풍경이 조금 특별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런 건 너무 가까이 있어서 쉽게 발견하지 못하거나 너무 하찮아서 쳐다보지 않게 된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보면 특별한 것들은 늘 나의 주위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고 나면 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혼자서 미소를 짓곤 한다. 라면이 그렇다는 말이다.

비가 와도 연등의 불은 반짝이고
비가 거세게 내리는데 사진으로는 평온하게 보인다
역시 비가 많이 내리는데 사진으로 표가 안 나네
비가 오기 전 날의 노을

오늘의 선곡은 김건모 3집의 그대와 함께 https://youtu.be/9lD-EVvr_x8

All NORE


매거진의 이전글 동네 카페를 갔는데 아이팟터치 3세대를 사용할 때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