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하늘보다 오늘의 하늘이 9

212

by 교관


212.


블랙우드가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있었다. 소피는 밤 11시가 넘어 갈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블랙우드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어린 시절 뒷골목에서 만나 거래 따위의 것으로 묶여있는 질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자정이 넘어가고 휴대전화는 꺼져있었다. 소피는 앞으로만 가는 시간 속에서 불안도 같이 커져 갔다.


식탁에 앉아서 얼마나 졸았을까. 문을 여는 불협화음의 소리가 들리더니 블랙우드가 들어왔다. 새벽 3시였다. 술은 마신 것 같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몸싸움이나 말썽을 부리고 온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동공은 술을 마신 것처럼 풀려 있었고 말린 사과에서 풍겨 나는 냄새가 났고 입은 옷은 어딘가에서 마구 앉아 있다가 온 듯 흙이 여러 군데 묻어 있었다. 소피는 달려가서 블랙우드를 부축했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블랙우드는 소피의 팔을 뿌리치고 방으로 올라갔다.


블랙우드는 향정신성의약품을 취급했던 것이다. 환각작용을 유발하는 약을 했다. 가끔 대마를 피우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약에 손을 대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대마도 하지 않겠다고 소피에게 약속을 한 터였다. 마약을 복용한 자들은 처벌이 엄중했다.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사람도 처벌을 받게 된다. 블랙우드는 시민권자이지만 비자로 들어와 있는 소피의 사정은 달랐다. 이제 비자가 만료되면 다시 기간을 연장해야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블랙우드가 월급을 아직 제때에 받아오지 않아 소피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조금씩 생활비를 충당했다.


일주일 전, 이유는 묻지 말고 소피에게는 큰돈에 해당하는 금액을 빌려달라는 블랙우드가 떠올랐다. 소피는 블랙우드와 대화를 하려고 했지만 블랙우드는 이른 아침에 나가서 새벽에 표현이 안 되는 냄새를 안고 들어왔다. 소피는 불안했다. 그날도 새벽 한 시가 다 되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피는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가로누워있었다.


오늘도 약을 했을까.

어디서 약을 하는 것일까.


문이 쾅, 천둥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소피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힘이 좋은 남자들의 완력에 침대에서 바로 눕혀졌다. “소피, 미안해”라고 말하는 블랙우드의 목소리에는 이미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약이 필요해.”


블랙우드는 방문에 기댄 채 서 있었고 흑인 두 명이 소피를 침대에 바로 눕히고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소피는 발버둥을 쳤다.


“개새끼, 이게 뭐 하는 거야!”


“소피, 미안해. 소피도 비자가 만료되어 가잖아. 저들이 소피의 고민을 덜어 줄 거야. 소피, 소피는 늘 나에게 미안해하며 지내고 있어.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


생명력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전자음 같은 블랙우드의 목소리는 소피의 마음을 칼바람에 뺨이 아플 정도로 찔렀다.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엄마가 죽었을 때도 마음으로만 울었다. 이런 일 따위에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 나약해지는 꼴을 보이는 것이다. 소피는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였다. 놀란 숭어처럼 파닥거리기만 할 뿐 생각만큼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발을 들어 올리려 해도, 주먹 쥔 손과 팔을 움직이려 해도 전혀 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무식한 역기로 단련된 흑인들의 힘은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흑인들은 사람 같지 않았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며칠 굶은 도사견 같았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명령만 하면 움직이는 그런 놈들이었다. 흑인과 동양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수치심이 물결치고 온몸을 휘감았다. 흑인들은 두 마리의 사나운 개에게 영혼 없이 움직이는 무거운 검은 물체로 변했다. 소피의 가슴이 드러났다. 소피는 주위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더욱 세게 고함을 질렀다.


“블랙우드 이 개새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믿었는데!”


소리를 지르고 나니 흘리던 눈물은 통곡으로 바뀌었다. 그러지 말아야 했지만 의지와는 무관하게 눈물이 마구 흘렀다. 믿고 있는 사람에게 희망보다는 배신을 당하는 자신의 꼴이 더욱 싫었다. 블랙우드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 소피.”


몸에 기대어 소피가 겁탈당하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얼굴에 비해 허옇게 보이는 이를 드러낸 두 마리의 검은 괴물보다 소피의 눈에 블랙우드가 더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었다. 초점이 빗나간 시선이었다. 블랙우드에게 시각은 의미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망막의 맹점을 자신이 보고 싶은 것으로 맞추었다. 표정도 없었고 회색빛의 눈으로 묵묵히 소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피는 팔과 다리를 꼼지락 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소피의 윗도리는 다 찢어졌고 바지는 반쯤 벗겨져서 팬티의 반이 드러났다. 흑인들은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며 즐거워했다. 생쥐를 잡은 고양이처럼 소피를 가지고 놀았다. 소피는 아버지에게 두드려 맞았을 때도 이를 다물고 견뎌냈다. 능욕당하는 수치심이 가슴으로 크게 밀려 올라왔다. 점점 뜨거워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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