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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삿바늘 같은 쇠붙이보다 큰 쇠붙이에게 다가가는 것이 마동에게는 수월했다. 변종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고 변종이 아니라고 해도 무거운 침묵 속에 들어갈 뿐이다. 마동은 거대한 쇠붙이에는 다가갔었다. 철길, 송전탑 같은 거대한 쇠붙이는 마치 로봇과 흡사했고 손을 닿아보면 그만의 실체와 세계가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과 가까이 있다는 기분은 유구했다. 거대한 쇠붙이는 높은 곳에서 또는 아주 먼 곳에서 마동을 긍휼히 바라보았다. 주삿바늘은 마동에게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마동은 성인이 되면서 병원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분홍간호사가 소리 없이 나간 후 마동은 조명을 받아서 더 붉게 보이는 주스 병을 집어 들었다. 눈을 떠서 두리번거렸을 때 주스는 이 방안에 단언하건대 없었다. 주스는 마동이 잠깐 눈을 감은 사이 어딘가에서 누군가로부터 아무도 모르게(마동도 모르게) 테이블 위에 놓였다. 눈에 익은 주스다. 뚜껑을 열고 마동은 벌컥벌컥 마셨다. 목으로 주스가 넘어가는 느낌이 좋았고 주스를 마시고 나니 배가 부르고 무엇보다 그 맛에 상당히 놀랐다. 이건 굉장한 맛이다,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주스를 마실수록 욕구가 올라오고 몸의 구석구석으로 실핏줄을 타고 힘이 전해졌다. 기존의 주스보다 맛있었다. 주스에서는 철분의 맛이 혀가 아릴 정도로 강하게 났는데 그 자극에 마동은 흥분했다. 과즙도 아니었고 육즙도 아니었지만 신선하고 깨끗하고 날것의 맛이었다. 처음 맛보는 맛이라 자세하게 설명은 안 되지만 월급을 통틀어 한 번에 사 먹을 수 있는 요리의 몇 배나 되는 맛이었다. 마동은 1리터 정도의 주스를 마시고 나니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팔다리가 제 것처럼 움직였다. 몸은 가벼웠고 그 탄력에 침대에서 뛰어서 바닥에 착지를 했다.
이 방은 내과 복도의 여러 개 문중에 하나를 열고 들어온 방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먼치킨 마을의 한 집처럼 작고 아담한 곳으로 용도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방이다. 수면실과 또 달랐다. 묘한 의사와 묘한 분홍간호사가 운영하는 묘한 내과 안의 묘한 방일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마동의 머릿속 사고는 이미 어느 시점에서 조금씩 삐거덕 거리기 시작해서 지금은 완전히 멈추었다. 그렇게 표현해도 무관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윤곽도 기억이 나지 않았고 하루 전의 일들에 대한 기억도 사고가 되지 않았다. 작은 그림자들이 마구 밀려 들어와 머릿속 기억 회로를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놓은 것 같았다.
“그래요, 한결 몸이 가벼워졌을 겁니다. 이제 어떠세요?”
신뢰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의 의사였다. 이 작은 방에 의사의 목소리는 하나의 선율처럼 방 안에서 물처럼 흘렀다가 바닥에 가라앉았다.
“어떻게 된 일이죠?”
마동은 자신의 목덜미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 뜨겁던 기운이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여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을 지닌 의사는 마동의 동공에 플래시불빛을 비쳐보고 반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의사는 여자 속옷의 버클을 능숙하게 풀어버리는 손놀림으로 마동의 머리를 살짝 젖히더니 목덜미를 유심히 확인했다.
“동공이 상당히 작아졌습니다. 지금 밖에 나가면 시야협착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수 있어요. 자칫 시력이 완전히 망가질 수 있습니다. 일단 낮 동안은 시야를 제대로 확보할 수 있도록 저희가 준비한 선글라스를 착용하세요. 낮에는 이걸 쓰고 다니도록 하세요. 선글라스라고 하지만 일반적인 안경으로 보일 뿐이니 실내에 들어갈 때도 벗지 않도록 하세요. 아무쪼록 조심해야 합니다.”
의사는 생각났다는 듯 “일반적인 안경점에서 판매하는 선글라스나 안경은 안 됩니다. 반드시 처방을 받아서 구입하거나 여기서 간호사에게 말씀해 주세요. 시력은 잃어버리고 나면 어떠한 경우에라도 되살리지 못합니다. 시력이 나빠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니 주의해 주세요.”
“아, 더 중요한 건 이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더라도 태양빛이 내리쬐는 곳에서 두 시간 이상 이동하는 것은 안 됩니다. 우리들의 소견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들이라는 건 의사와 분홍간호사 외에 또 다른 의사가 있다는 말인가. 여기도 어떤 집단에 속하는 곳일까.
여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을 가진 의사는 간호사처럼 마치 마동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 자신이 가지고 온 선글라스를 써보라고 건네주었다.
정말 이 의사는 누구일까. 단순한 내과전문의는 아니다. 도대체 누구일까. 분홍간호사와 어떤 사이일까. 그렇다면 분홍간호사는 역시 누구일까.
“인간은 뇌의 기능 중에 단지 2%만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인간이 뇌의 기능을 50% 정도만 사용을 한다고 해도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후의 인간이라면 또 모를까 말이죠. 그런데 만약 인간이 뇌의 90% 이상을 사용해 버린다면 지금 우리 모습에서 굉장히 진화한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겁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