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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의 주스를 마시고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도 안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불안함은 확실하게 마동의 마음을 압박하며 조여왔다. 사람들의 두려움에 가득 찬 의식이 끊임없이 전해져 왔다. 마동은 휴대전화를 찾으려고 바지주머니를 뒤지고 일어나서 방으로 가려다 식탁 위의 메모지를 발견했다. 작은 메모지에는 는개가 써 놓고 간 흘림체의 활자가 가득했다.
[당신의 잠꼬대를 들었어요. 그 잠꼬대는 깊은 슬픔이더군요.
단지 그렇게 들렸을 뿐이지만.
당신은 감당해내지 못하는 큰 짐을 짊어지고 있는 듯했어요. 왜 당신은 힘겨운 길을 걸어가는지 마동 씨는 알지 못해요. 당신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알지 못해요, 그 누구도 말이에요. 전 당신이 안타깝게 느껴졌어요.]
는개가 적어놓은 메모는 꽤 길었다. 꼼꼼하고 야무진 그녀만의 필체가 편지지 가득 쓰여있었다. 그녀가 써 놓은 글씨에는 그녀의 말투가 묻어 나왔다. 는개는 덤덤하게 가느다란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녀만의 필체로 메모를 써놓고 나갔다.
[이 세계에서 필요 없는 존재는 없어요. 인간의 이기심이 박멸이라는 이름하에 없애려는 바퀴벌레들도 오랫동안 잔존감을 남기며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바퀴벌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벌레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오랫동안 보이는 것만 믿어왔어요. 당신은 닿을 수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려고만 해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전 그걸 알 수 있어요. (웃음) 지금 편지를 읽을 당신, 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옷은 제가 들고 갈게요. 깨끗하게 빨아서 다시 입고 당신과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는개는 바쁜 아침의 시간 속에서 시간을 들여 탁자에 앉아서 천천히 메모를 했다. 그리고 집안에 남아있는 그녀의 흔적을 빗자루로 쓸어 담듯 가지고 돌아가 버렸다. 마동은 지난밤, 그녀와 함께 사들고 온 빈 와인병과 와인 잔만이 버려진 물품처럼 놓여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뜨거운 냄비 속에서 매운탕으로 향해가기 위해 대열을 맞추었던 물고기의 대가리도 사라졌고, 냄비에 가득했던 끓는 물도 사라졌다. 쥐돔과 아홉 동가리는 마동과 그녀의 입과 허공의 미립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들어와 인간의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머리통은 음식물쓰레기에 섞여서 분해되고 어딘가로 뿌려질 것이다.
점점 사람들 의식의 전달이 작아졌다. 마동은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서 모니터를 틀었다. 티브이 프로그램 아침방송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나 명사를 초빙해서 건강이나 생활정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변태학적 성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은 인간이, 즉 남녀가 서로 상호작용의 부재에서 나타난다고 명사는 열변했다. 인간은 엄마의 큰(아기에게는) 젖을 빨면서 그 감촉을 느끼고 상호작용을 터득하게 되는데, 성인이 되어 그 상호작용의 소멸이 일어나면 일탈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인간은 만져지면 흥분과 기분이 좋아지지만 보통 남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기를 만진다고 해서 여자들은 흥분을 하게 된다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보다 더 근본적인 감촉, 인간의 손과 손이, 손으로 등을, 상대방의 몸을 만지는 것에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의 소멸이 성기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포르노영화의 보급이 빠르고, 퇴폐적인 공간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의 범죄성향도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아무도 만져주는 이가 없음에 오는 실태로 보인다. 심리학자는 아침방송에서 상호작용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방송국 스튜디오 안에 모여든 방청객들은 리허설에서 배운 대로, 자기 일처럼 입을 벌리고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박수를 쳤다.
마동은 오너에게 전화를 했다. 오너는 마동의 몸 상태의 안부를 물었고 마동은 대답했다. 오너는 마동에게 형사들이 찾아왔다고 말하고 마동은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마동은 꺼내기 힘든 말이었지만 오너에게 회사는 이제 그만 관둬야겠다고 말을 했다.
(잠시침묵)
오너는 알겠다고 수긍했다.
“어제새벽에 자네의 작업분량을 받았네. 그리고 이메일에 자네가 관둬야 하는 이유를 적어 놨더군. 자네는 나에게 확인을 하고 삭제를 부탁했네. 이메일은 삭제를 했네만 정부에서 캐내려고 하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자네는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갔던 모양이군.”
(잠시침묵)
수화기너머로 들리는 오너의 목소리는 클라이언트의 재작업을 부탁할 때보다 덜 흥분했다. 아니 오히려 침착했고 부드러웠다. 단지 오너는 이틀 동안 밤을 새웠는지 목소리에 피곤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