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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이는 저 큰 자줏빛해무가 쉬르리얼리즘사진을 보는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마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현실사진 속의 세계에는 현실에서 유린된 우리의 삶이 아주 잘 가꾸어진 화단의 꽃처럼 보였다. 그 속에는 질서에 의한 가지런한 규정이 아닌 뒤죽박죽인 비규정적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마동은 쉼 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스렸다.
모든 것을 끝내고 조화와 균형을 잡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준비운동은 이미 끝냈다. 수영장에 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자줏빛 해무 속으로 마동은 자신을 집어넣기만 하면 편안한 물속에서 물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유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된 생각을 굳혔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자. 분명 생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마동은 그 희박한 가능성을 잡고 싶었다. 희망과는 다른 ‘가능성’에 손을 내밀었다.
쿠르릉.
마치 미카엘과 루시퍼가 대립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천사와 악마가 있다면 누가 이길까. 마동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천사가 이긴다는 쪽에 한 표를 던질 수가 없었다. 그것은 왜일까. 천사는 악마를 이겨야 하고 늘 이겨왔다. 우리는 천사를 당연히 좋아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마동은 천사를 둘러싼 적막감과 천사의 날개가 어깨를 뚫고 나오는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천사의 맑고 깨끗함에 대해서도, 백색의 공포가 주는 충격에 대해서도.
천사가 악마를 이기는 이면에는 마음속 여러 감정의 폐허가 악마보다 조금 덜해서 그럴 뿐이다. 애를 써도 천사에 한 표를 던질 수가 없었다. 결국 천사와 악마는 둘 다 연민스러운 존재였다. 누가 이기는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병아리 암수구별을 해내는 감별사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동은 천사와 악마, 둘 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똑같이 등을 두드려주고 싶었다. 꼭 이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잘 지느냐 하는 것이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순간도 있다. 자기 자신은 반드시 이겨야 할 존재가 아닌 것처럼.
이어서 마동이 서있는 테트로포드로 불어오는 기이한 공간의 냄새가 났다.
철탑인간을 떠 올렸다. 손이 세 개, 말할 때마다 쇳가루를 떨어트리던 철탑인간. 그리고 견고한 관능을 지닌 사라 발렌샤 얀시엔을 마동은 생각했다. 철탑인간은 꿈속에서 마동에게 고문을 가했다. 철탑인간이 왜 그토록 마동을 싫어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철탑인간은 본디 인간을 싫어하지 않았다. 철탑인간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딱딱하고 무섭게만 보이는 철탑인간을 인간의 생활반경에서 벗어나게 했다. 꿈속에서 만난 철탑인간은 마동에게 고문으로 고통을 줬지만 상당히 자조적이었다. 철탑인간의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마동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줬지만 철탑인간 역시 극장이기를 포기한 텅 빈 층의 건물처럼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고통의 모습에는 억제와 변하지 않는 보류가 서려있었다. 교언영색을 한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인간을 서서히 배제하게 되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은 언제나 고요했다. 언제나라고 말하지만 딱 한 번이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을 본 건 며칠 전 한 번 뿐이었다. 그리고 지저분한 스크린 속에서 또 한 번 봤을 뿐이다. 그런 사라 발렌샤 얀시엔이 누구인지 왜 마동에게로 왔는지 궁금하지만 그대로 묻어 둘 수밖에 없었다. 마동은 사라 발렌샤 얀시엔을 만나 후 며칠 동안 낮과 밤의 차이도, 꿈과 현실의 경계도 없는 모호한 여백의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은 는개의 알터에고였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