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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Nov 27. 2024

출근길 14

축제의 기억


14.


 여기서부터는 완연한 다운타운이다. 오 분 정도 가면 도착이다. 그러나 그사이에 신호등이 다섯 개나 있다. 다운타운에서는 계절마다 축제를 한다. 마을 축제 같은 것이다. 다운타운이다 보니 가게가 많고 점포에서는 손님들을 끌기 위해 축제에 참여하는 빈도가 높다. 봄가을에 크고 작은 축제가 많이 열리지만 여름과 겨울에도 주말에 소규모의 축제가 열린다.               


 봄가을에는 도시 규모로 하는 대규모 축제가 열리는데 인기 있는 가수도 초청되어서 본격적인 축. 제. 가 펼쳐진다. 겨울이나 여름에는 지역 소상공인들이 주가 되어서 여는 축제는 규모가 자그마하지만 매년 꾸준하게 지치지 않고 개최해서 그만큼 수요도 늘어났다.     

           

 지난번 가을 축제는 멋있었다. 축제의 꽃은 아무래도 먹거리다. 축제 먹거리가 말이 많지만 그럼에도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는 먹거리를 사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친다면 축제가 아주 많이 열린다. 나는 예전에 아주 특이한 축제를 구경한 일이 있었다. 여자 친구와 휴가를 받아서 춘천으로 가는 길이었다.               


 둘 다 일이 바빠서 모두가 떠나는 시즌에는 여름휴가를 받지 못하고 한풀 꺾인 9월 초에 휴가를 떠났다. 남이섬으로 가는 길이었다. 남이섬에는 두 번째다. 첫 번째 남이섬에서의 추억이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또 가기로 했다. 여기에서 춘천까지는 아주 먼 거리로 7번 국도를 타고 죽 올라가는 여행길도 기분이 좋다. 우측으로 바다를 계속 보며 달릴 수 있다. 바다라는 건 늘 가까이에서 보는 친근한 바다가 있고, 먼 곳에서 보는 이질적인 바다가 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오후 늦게 도착했다.     

          

 그러나 남이섬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는 춘천 시내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남이섬으로 갔다. 배를 타고 남이섬 안으로 들어간다. 남이섬에는 한창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남이섬 안에도 호텔이 있는데 항상 만원이다. 언젠가 우리도? 같은 다짐을 하면서 남이섬의 축제 현장 안으로 들어섰다.     

           

 축제는 마치 미국의 웨스턴의 한 지역의 분위기였다. 섬 전체가 완전한 축제의 장이 된 것 같았다. 오전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축제가 열리지 않았지만 구경할 것들은 많았다. 게 중에서 우리는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된 공간에서 시간을 오랫동안 보냈다. 색감이나 분위기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쓸쓸하게 보였다. 우리는 그림 하나에 붙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는 일은 간판 회사에서 디자인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란 그녀에게 있어서 애증 같은 것이었다. 떼어버리고 싶지만 뗄 수 없는 손모가지였다. 한 번은 애벗 맥닐 휘슬러의 그림에 대해서 몇 시간이나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계기로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유명 화가의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리면 기를 쓰고 기차를 타고 올라가서 볼 만큼 그림 전시를 관람하는 걸 좋아했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디자인을 선택했다. 미술대학에서는 교수의 추천까지 받았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무엇보다 시간을 들여 그림을 그려야 했다. 부모님을 사고로 전부 잃고 동생 두 명을 데리고 살던 그녀는 그럴 수만은 없었다. 현실이 폭력이 된 것이다. 무난하지만 그녀의 실력이면 디자인으로 생계는 충분히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응원했다. 틈틈이 그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만나서 데이트할 때도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작은 작업실에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옆에 있어 주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동기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주눅 들어갔다.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그게 잘 안되었다. 그녀는 죽고 못 살았던 대학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점점 피하게 되었다. 나는 어쩌면 그 친구들 대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었다.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 역시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의 두 동생 역시 나를 잘 따랐다. 명절에는 집으로 불러 같이 밥을 먹었다. 그녀는 회사에 다니며 착실하게 두 동생을 뒷바라지했다. 그러나 그녀 마음속 자괴감이 극심하게 올라올 때면 그녀는 제일 먼저 술을 찾았다. 처음에는 조금씩 마시던 술이 나중에는 술이 그녀를 집어삼키게 되었다. 우리는 데이트할 때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녀는 술을 마시면 절제가 되지 않았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     

          

 그녀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아서 병원을 찾아서 상담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 자신을 떠나지 않아서 고맙다고. 술만 마시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기 때문에 술만 피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어려운 것이 없다. 그렇게만 하면 쉬운 일이다. 술을 마신 후의 그녀는 너무 힘든 사람이지만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한없이 사랑이 흐르는 사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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