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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n 19. 2020

라면과 음모론

일상 에세이


그렇게 끓이면 라면이 짜지 않겠어?


흥, 라면은 짜야 맛있다.

라면 맛도 모르면서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짜게 먹는 건 좋지 못하다는 건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나 역시 지구인이니까 모르지는 않다. 만약 라면을 매일 먹는다면 또 모를까, 어쩌다 먹는 라면인데 먹고 싶은 대로 끓여서 맛있게 먹는 것이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는 일이다.


사진의 라면은 거의 전골 수준으로 밑에는 목살이 깔려 있고 신김치도 들어 있으며 무생채가 많이 들어가 있다. 큰 만두도 2개 정도 들어 있고 땡초와 양파도 들어있다. 마지막에는 식초를 한 숟가락 풀었다. 뜨거운 국물에는 식초가 잘 어울린다. 뜨거운 라면을 후루룩 빨아 당긴 다음 쿰척쿰척 먹고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신다. 이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렇게 먹기 위해 일을 마치고 오는 내내 다른 것에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라면 전골 하나를 생각하며 왔다.


먹는 녀석들에서도 김준현이 한 여름에 밤새 낚시를 하고 아침에 그 찝찝함을 가득 안은채 집으로 오면서 초밥 한 팩과 시원한 맥주를 사들고 와서 냉장고에 넣은 다음 샤워를 할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흐르는 땀을 꾹꾹 참고 있다가 샤워가 끝남과 동시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초밥 하나를 입에 넣었을 때의 그 기쁨은 무엇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때때로 건강과는 무관하게 행복에 다가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반드시 좋지 않다, 옳지 못 하다, 나쁘다,라고만 할 수는 없다. 건강학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순간이 가득한 것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서 스트레스로 구멍이 숭숭 뚫리는 것보다 나은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근래의 우리는 간단하고 저렴하지만 배가 부르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의 백종원 레서피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의 요리방법에 대해서 말은 많아서 건강과는 좀 멀지 몰라도 매일 신선한 재료로 장을 봐서 깨끗하게 손질하여 매끼를 챙겨 먹을 수 없는 현실에서 그의 요리법은 비록 조금 건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한 끼 마음 놓고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김치는 밥상의 옵서버 역할이지만 김치 자체가 아주 맛있을 때가 언제냐면, 계란 프라이를 밥 위에 올려 노른자를 터트렸을 때 밥 위로 노른자가 햇살처럼 흘러내리는데, 그때 김치로 그 부분을 싸서 먹는 그 맛이 좋다. 게다가 갖추어진 식탁에서 느긋하게 먹는 것보다 개인적으로는 식탁에 서서 계란 프라이를 해서 밥 위에 올려 김치를 곁들여 빠르게 후루룩 입 안에 가득 넣어서 하얀 벽을 보며 우물거리며 먹는 맛을 좋아한다. 노른자의 맛과 김치의 깊은 맛이 한데 어우러져 그 순간은 행복하다. 누군가는 일어서서 먹는 것에 애처롭다, 딱하다, 또는 불쌍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저 재빠르고 맛있게 작은 밥공기의 밥을 먹어치우는 그 맛이 있다. 타인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식사와 방식일지 몰라도 그 방식으로 행복하다면 건강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일지도 모른다.


김치가 맛있으려면 배추가 맛있어야 한다. 배추는 일 년에 여러 번 재배할 수 있다. 그래서 토양이 좋으면 배추는 맛있다. 그게 일반적인 정설이고 맞는 말이고 다 아는 말이다. 하지만 배추는 정말 신기하게도 쓰레기 처리장, 또는 폐수처리장 같은 오물이 잔뜩 있고 더러운 곳에 배추씨앗을 심어놔도 배추는 무럭무럭 잘 큰다. 그럼 그 배추는 맛이 없고 더러운 배추인가?라고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배추는 더러운 토양 속에서 자양분이 될 만한 것들만 빨아먹는다. 단지 더러운 토양에서 자란 배추는 더러울 것이라는 우리의 의식이 그 배추를 멀리하는 것뿐이다. 배추는 어디서나 씩씩하고 생생하다. 물론 토양이 좋고 공기가 좋으면 정말 좋겠지만 대륙이라 불리는 중국에서 난 배추가 꼭 그렇게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싱싱한 배추를 많이 먹는다면 인간도 배추의 유전자를 닮아서 언제나 씩씩하고 싱싱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본다.


라면을 짜게 먹고 편의점 음식을 많이 사 먹으면 사람들은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한다. 병 생기고 고통스럽게 보내다가 일찍 죽는다 식으로 끝맺음한다. 먹방 유튜버들을 보며 칭찬 반, 욕 반인 이유도 그 속에는 너처럼 그렇게 먹다가는, 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예전에 비해서 인스턴트를 그렇게 먹고 1인 가구가 4인 가구를 넘어선 지금, 편의점 음식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옛날의 사람보다 수명이 더 늘어났다. 게다가 체격도 체력도 더 커지고 늘어났으며 현재의 50세는 예전의 30세보다 더 젊어 보이기도 한다.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를 읽어보면 세상이 종말 한 후 폐허가 된 지구의 도심에서 살아남아 있는 건 코카콜라 캔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것을 따서 마시며 추억에 젖고 처음 보는 맛에 아들은 기뻐한다. 코카콜라는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도 않고 맛도 변하지 않은 채 절망 속에서 하나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매일 챙겨 먹는 영양제는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일까. 나는 영양제는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근래에 오메가 3을 먹으라고 줘서 한 알씩 먹고 있는데 주위를 보면 대체로 5, 6알씩 챙겨 먹는다. 아침은 먹지 않아도 영양제는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고 한다. 이거는 뭐에 좋고, 라면서. 효과를 보려면 얼마큼 먹어야 하는지, 또 효과는 언제 나타나는지 아는 사람은 사실 없다. 아침은 먹지 않으면서 이렇게 10알 가까이 매일 먹는다면 간이나 신장에 무리를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영양제는 꼭 플라세보 같다. 먹으면 그 하루는 정말 튼튼하다고 느껴져서 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다면 그것대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하루에 몇 알씩 들어가는 비용이 개인적으로는 비싸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건강에 부쩍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영양제가 신경 쓰는 생활 사이를 파고들었다. 매일 챙겨 먹듯 매일 운동을 하라고 권해보지만 운동은 하기 싫어한다. 나는 조깅을 매일 하라고 하지만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기 때문에 싫다고 한다. 무식한 생각이지만 영양제를 챙겨 먹기보다는 운동을 매일 하고 골고루 식사를 하는 게 더 낫다고 보지만 사람은 제각각인 동물이니까.


그렇다면 운동을 많이 하는 것은 어떨까. 나 같은 경우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하는데 주위에 운동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에 3시간 정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매일 한다. 몸이 캡아처럼 막 이렇다. 그래서 운동을 하고 나오면 힘없어하는데, 아 운동하느라, 운동하고 왔어, 운동했으니까.라는 말로 에너지를 운동하는데 다 쏟았다는 의미다. 운동은 생활의 활력을 가지려고 하는 건데 정작 운동할 때에는 활력 가득히 운동을 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힘이 빠져서 아 몰라, 같은 분위기면 운동 중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운동을 많이 하면 건강한가?라는 질문에 다가가면 글쎄다. 왜냐하면 운동선수 출신들은 거의 20년 넘게, 운동을 하루에 8시간 이상을 해왔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투병으로 사망하는 기사를 우리는 그동안 봐왔다. 축구선수였던 최용수도 감독을 하고 나서는 배가 너무 나와 버렸다. 운동을 안 하던 사람들이 운동을 일주일 정도 하면 마치 20년 동안 운동을 해왔던 사람처럼 말을 한다. 하루에 몇 시간씩 운동을 하기보다 운동량을 죽 늘려서 15분을 하더라도 죽기 직전까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나 정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운동을 하지 않고 건강하고 정신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굳이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운동을 '많이' 하는 것과 건강과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겠다.


나는 주위에 조깅이 가장 좋은 운동이라 조깅을 권한다. 이유는 돈이 들지 않는다. 다른 운동처럼 거창하게 복장이나 스타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당연하지만 누군가에게, 또는 조깅을 하기 위해 필드를 사용하는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운동화만 있으면 매일 어디던 조깅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이쪽으로 달리는 것이 지겨우면 저쪽으로 달리면 되고, 평지를 달리는 것이 심심하면 코스에 오르막길이나 공원의 계단을 집어넣어서 달리면 된다. 기분 좋은 고통을 느끼게 하며 기분을 확 끌어올려준다. 물론 나의 기준에서다. 하지만 조깅이 무릎에 무리를 주어 달리고 나면 걷지도 못할 정도로 다리가 아프다면 조깅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재미없는 운동이기에 재미있지 않으면 도저히 운동을 할 수 없는 사람도 달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매일매일 조깅을 하기 직전까지는 달리지 말아야 할 이유 100가지가 유혹을 한다. 오늘은 귀찮고 힘들기 때문에 달리기 싫은 이유는 늘 내 곁을 맴돈다. 하지만 달려야 하는 이유 한 가지가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달리고 나면 오늘도 심장에 건강한 무리를 줬다는 생각이 들면서 맥주 맛도 좋다. 매일 달리다 보면 매일 스치는 사람들이 있고 재미있는 모습을 마주할 때가 있는데 너무 길어지니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뭐니 뭐니 해도 아직은 기름 맛이 좋다. 삼겹살의 기름 맛이 좋고, 몸에 안 좋으니 해도 소고기 기름 맛이 좋다. 삼겹살을 먹는 나라는 공교롭게도 전 세계에서 딱 두 나라라고 한다. 한국과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작은 섬나라, 피지다. 그렇게 두 나라뿐이다. 그러니까 돼지고기에 기름이 붙어 있는 맛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 섬나라 사람들은 우리보다 기름을 더 많이 먹는데(요컨대 삼겹살에 붙은 기름을 물에 끓여서 같이 먹기도 하고) 기름의 고소한 맛에 국민 모두가 취해 있다. 그리하여 대체로 뚱뚱하며 성인병에 걸려 있어서 섬을 나와서 병원에 다녀야 하는데 문제는 기름 맛에 취해서 인지 생활에 필요한 생산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어때? 다음에 하지 뭐. 같은 생각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삼겹살이 한국에서 많이 먹게 된 계기는 어쩌면 일본 때문이다. 일본은 돼지 사육을 거의 하지 않았다. 돼지 사육장 하나가 생기면 반경 몇 킬로미터는 대체로 엉망이 된다고 한다. 오물과 함께 땅이 더러워진다. 그리하여 섬나라 일본은 섬이 더러워진다는 이유로(제주도는 괜찮을까) 돼지를 수입해서 먹었다. 그들은 보통 앞다리살 같은 좋은 부위를 수입해서 돈가스를 해서 먹었는데 일본이 돼지고기를 수입하는 나라가 한국과 대만이었다. 그런데 70 몇 년도 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만에 돼지 파동이 일어난다. 그러면서 일본 사람이 먹는 70%에 달하는 돼지고기를 한국에서 가져갔다.


엄청난 양이 일본으로 가고 남은 고기가 삼겹살이었다. 이 삼겹살을 처분해야 하는데 방법을 모색하던 당시 정부는, 그때 한국인들이 광산으로 흘러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6일 동안 실컷 일하느라 평일에는 제대로 먹지 못하는 고기 소비를 주말에 하게 한다.  탄광일을 하느라 몸속에 낀 시커먼 먼지가 삼겹살을 먹으면 그것이 씻겨 내려간다는 음모론 같은 것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삼겹살은 대대적으로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탄광의 먼지는 코를 통해 폐로 들어가고 삼겹살은 입을 통해 위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통로가 완전히 다름에도 사람들은 삼겹살이 몸을 깨끗하게 해 줄거라 믿으며 토요일 저녁이면 많은 아버지들은 불판에 삼겹살을 구웠다.


어쩌면 그때부터 한국의 욜로 문화는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바라는 욜로는 산으로 들로 캠핑을 가서 그곳을 즐기는 것이지만, 실상은 그곳에서 고기나 소시지 같은 먹거리를 거하게 차려서 먹는 것으로 욜로를 대신한다. 주 6일제였던 예전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을 하고 일요일에는 산이나 강으로 가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일주일의 시름을 잊었다. 그것이 한국식 욜로의 시초였을지도 모른다.


음모론은 다금바리와 비슷하다. 바다의 보석 다금바리. 다금바리는 하루에 많이 잡히면 3, 4마리 정도이며 오직 제주도의 바다에서만 잡힌다. 제주도에 가면 무엇이 가장 먹고 싶은지 물어보면 십중팔구 어른들의 대답은 다금바리다. 무리를 해서 몇 십만 원이나 하는 다금바리를 전투적으로 찾으러 다니기도 한다. 둘 중에 하나가 죽어도 모를 회 맛이라는 묘한 기류가 어른들에게는 확실하게 박혀있다. 이렇게 어르신들이 찾는 다금바리는 정말 환상의 맛일까. 우리가 먹는 광어나 우럭, 좀 많이 비싼 돔에 비해 월등히 맛이 좋은 걸까.


사실 다금바리를 먹어본 제주도 사람들의 인터뷰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가히 환상적인 맛이군, 이건 정말 주체할 수 없는 맛이야, 하며 엄지를 척 치켜들 만큼 맛있는지에 대해서 현지인들은 의문을 가진다. 보통 회보다 졸깃하다 정도라고 한다. 이 졸깃하다는 말은 맛이라기보다는 물리적인 표현으로 더 맞다. 다금바리는 아주 드문 물고기다. 하지만 제주도 다금바리 파는 곳에 가면 모두 다금바리가 있다고 한다. 모든 다금바리가 횟집에서 팔아치울 수 있는 횟감이 아님에도 다금바리를 육지 어르신들은 갈 때마다 먹고 온다.


어째서 그럴까. 그건 다금바리에 대해서 뇌는 기억을 조작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금바리 집에서는 비슷한 횟감을 올리고 다금바리라 하지만 육지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르르 몰려 마케팅의 세계에 들어가 버리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어른들이 다단계에 잘 넘어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입소문은 끊임없이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마치 유전자처럼 돌고 돌며 대물림된다. 다금바리는 혀 감각의 문제임에도 뇌가 그 감각을 조작해버린다. 다금바리는 사람들의 환상이 만들어낸 맛일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자연산 회가 양식 회보다 비싼 이유가 싱싱하다는 이유 때문인데 자연산 회는 잡아서 바로 먹어야 맛있다. 자연을 보며 그 자리에 앉아서 활어회로 먹으면 정말 맛있다. 그런데 그 자연산 회 자리에 양식 회를 넣어놔도 똑같이 맛있다. 양식 회를 자연 속에서 먹어도 기가 막히게 맛이 좋다. 집에서 먹는 것보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면 더 맛이 좋은 이유도 식당을 감도는 분위기, 그 속에 흐르는 음악, 조명, 음식의 냄새, 테이블마다 떠들썩한 행복한 대화가 음식의 맛을 더 끌어올려준다. 그리하여 같은 음식이라도 포장을 해서 집으로 들고 오면 음식점에서 먹는 것만큼 맛이 나지 않는다.


횟집에서 파는 자연산 회보다 양식 회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자연산 회는 잡아서 횟집으로 오는 동안 수조에 갇혀 있기에 물고기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보통 갇힌 공간에서 3시간  정도가 지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신이 똥을 싸고 그 똥을 다시 먹기를 반복한다. 죽지 말라고 수조에 약품처리를 한다. 그렇게 도시 속의 횟집으로 들어간다. 다시 그곳의 수족관으로 들어간다. 산소공급 때문에 원래는 수족관에 거품이 부글부글 일어야 하지만 미관상 보기 좋지 않아서 소포제(유해한 기포를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약품이다. 소포제로는 일반적으로 휘발성이 적고 확산력이 큰 기름상의 물질, 또는 수용성의 계면활성제가 이용된다)라는 약품을 또 넣는다. 그러면 거품이 일지 않는다. 자연산 회는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약품을 계속 먹게 된다. 그리고 손님에게 양식 회보다 비싸게 팔린다. 가끔 자연산 회를 먹고 바이러스나 세균에 감염됐다는 뉴스가 나온다. 나는 주위에 자연산 회에 목숨 걸지 말고 횟집 가서 양식 회를 사 먹으라고 한다. 가격 저렴하지 양식하면서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적당한 항생제로 관리를 하는 양식 회가 훨씬 안전하고 맛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요즘 양식장은 크고 넓어서 광어의 운동량이 많아서 씹는 맛도 좋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산 회는 잡아서 그날 소비를 해야 그 맛이나 위생에 대해서 걱정이 덜 하다. 명절 같은 연휴에 바닷가 횟집에는 가족단위로 삼삼오오 몰려든다. 가족이 오랜만에 모였으니 아버지들은 모처럼 자연산으로 먹자고 한다. 비싸지만 그날 하루는 가족들을 위해 크게 쏠 수 있다. 하지만 명절 기간에는 어선이 출항하지 않는다. 아무리 못해서 횟집 수조 속 자연산 회는 며칠 동안은 그 속에서 스트레스를 실컷 받았다. 정답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음모론에 적응이 완전하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안티에이징에 탁월한 화장품, 이 샴푸로 감으면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는다는 광고, 먹기만 하면 낫는다는 약, 근래에는 줄 서서 먹는 식당의 음식은 굉장한 맛을 낸다는 음모론을 그간 우리는 흡수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뉴스에서 보는 기사들이 전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멍이 뚫리거나, 그 구멍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경우를 보면서 지내왔다. 어떤 모형으로도 뚫린 구멍과 맞지 않을 때 ‘음모론’을 그 구멍에 씌우면 딱 들어맞는 경우도 있다. 음모론이 도래하는 것은 의문이 들고 진실을 알고 싶은데 그 누구도 제대로 답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에서는 늘 모종의 음모론을 조장하는 계획이나 프로젝트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드 ‘세이렌’에서처럼 국민을 바보로 알고 국민을 모르게 무엇인가를 꼭 하려고 한다.


이 사태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같은 말을 국가는 늘 한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콕 집어 어디의 누가 잘못한 것입니다,라든가,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같은 말은 국가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꼴베기 싫다고 산으로 기어 들어가 평생 글이나 쓰면서 보내는 일본의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읽어보면 한 챕터에서 ‘국가는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조직이나 단체의 이익을 우선으로 따지지, 개개인을 위하는 국가는 사실 지구 상에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건강이 망가져 병원에 늘 다녀야 하지만 자기 좋을 대로 생활하고 기름 맛에 취해 이 한 세상 허허실실 보내는 섬나라 피지 사람들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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