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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의 미학 :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이유

나를 위하여, 남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열심히 좋은 일 합시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이유 : 네이버 블로그                                                                                                                                                                                                                                                                                                                                                                                                                                                                                                                                                                                                                               

우리는 왜 남을 도울까 ?

가. 나를 위해 돕는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청계천 다리 위에서 앞에 어떤 분이 걸어가시는 데 다 헤진 얇은 웃옷을 입고 계시더라고요. 옆으로 가니 냄새도 좀 나는 듯했습니다. 아마 노숙하시는 분인 듯했습니다. 너무 안 되 보여서 주머니에서 1만원을 꺼내어 그 분의 주머니에 넣어드리고 지나갔습니다. 다리를 건너고 다시 돌아보니 그 분은 그 자리에 내가 돈을 넣어줄 때 그 모습 그대로 서있는 걸 보았습니다. 저도 멀리서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내가 저 분의 주머니에 불쑥 돈을 넣어도 되?’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는 선의였기는 하지만 남의 처지를 내가 함부로 판단하고, 남의 주머니에 돈을 넣는 것이 실례는 아니었는 지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솔직히 별로 잘 한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그 분의 외모만을 가지고 내가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저도 의아합니다. ‘도움’이라는 단어조차 생각하지 않고 ‘아 춥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얼마나 추울까?’하는 안타까움에 ‘따듯한 국물이라고 마시면 좋겠지?’라는 상상을 하면서 그야말로 ‘얼떨결에’ 그런 행동을 한 겁니다. 그렇다고 내 주머니에 지폐가 철철 넘치도록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 사람이나 나나 오십보 백보의 처지였습니다. 내 마음 속 깊은 속에서 누군가가 저에게 충동질을 한 겁니다. 본능이랄까, 아니면 초자아라는 무의식이 ‘저 사람을 도와야 해!, 언제 네가 남을 도와준 적 있어? 이 번에라도 한 번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충동적인 행위를 하고 가만히 서서 그 분을 보면서, 또 한 편으로는 내 모습이 보입니다. 스스로 좋은 일을 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내 모습 말입니다. 언제나 나만을 위해 살며, 이기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던 내가 남을 위해 나로서는 적지 않은 물질을 남에게 베풀었다는 기특함이 제 가슴 속에 떠올랐습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연못 속의 자기 모습을 보고 반해서 쳐다보고 있는 나르시스처럼 말입니다. 남을 도운 내 모습을 내가 보니 더 나를 좋아하게 되더군요. 사람들은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워 남을 돕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기는 합니다. 
   
나. 사회를 위해 돕는다
“국민안전처(장관 박인용)는 전국재해구호협회(회장 송필호)와 함께 지난달 2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참 안전인 상’ 시상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번 시상식에서는 박춘식, 김장현, 이동영, 故 양명승씨 등 의인 총 4명이 수상했다. 박춘식(50)씨는 지난해 10월 태풍 ‘차바’로 울산 태화시장이 물바다가 됐을 때 급류에 휩쓸려가는 차 안에 갇힌 여성을 구했다. 김장현(45), 이동영(34)씨는 지난해 10월 서울 오패산터널 입구에서 경찰관을 사제 총기로 쏴 살해하고 도주하는 용의자를 제압했다. 고(故) 양명승(60)씨는 올해 3월 서울시 노원구 소재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평소 심장질환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5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주민들을 대피시키다 쓰러져 안타깝게 사망했다.” (소방방재신문, 2017.5.3.)
이런 의인들은 ‘자신이 피해를 입을 수 있는데도 남을 도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분들은 남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전자가 있을까도 싶습니다. 우리의 뇌에는 ‘거울뉴런’이 있습니다. 이 뉴런은 다른 행위자가 행한 행동을 관찰하기만 해도 자신이 그 행위를 직접 할 때와 똑같은 활성을 내는 신경 세포입니다. 이 뉴런이 있기에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뿐더러, 그 사람과 감정적으로 같은 느낌을 갖는 공감이 가능합니다. 그 거울 뉴런이 ‘의인’들에게는 특히 발달되어 남의 고통을 같이 아파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타적인 사람이 많아야 사회는 긍정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는 ‘개개인의 이기심이 사회를 가장 효율적으로 발전시킨다’고 합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기심만을 최우선으로 한다면 사회는 남을 배려하지 않는 무한 경쟁 시스템으로 변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회는 개인이 나 홀로 사는 곳이 아닌, 가족. 친구. 동료. 이웃 등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고독한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 교감을 하며 행복을 느끼는 존재이지요. 그렇기에 다른 사람과 관계는 인간이 ‘존재조건’이고, 사회적인 상부상조는 보다 발전적인 삶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고, 또한 사회적 발전의 전제 조건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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