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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재해석 -110) 친구와 걷기

110 누구와 걸을까 – 친구와 걷기



나는 62년생 소띠이다. 나도 내 나이가 이 정도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새 친구가 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군대 중대장은 물론이고 참모총장보다도 많은 나이가 되었다. 내 나이가 그 정도이니 당연히 친구들도 나처럼 되었다. 그 친구들과 걷는 것은 추억을 되돌아보는 인생의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한 놈 두 놈 유명을 달리할 때마다 안타까움이 쌓여가는 대상이기도 하다. 내가 자주 같이 걷는 친구들은 경동고를 같이 졸업한 동창들이고, 새로 걷기 시작한 모임은 코트라 89년 입사 동기들이다. 이미 30여년 이상을 같이 해온 친구들이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40여 년 전에 만났고, 코트라 친구들은 30여 년 전에 만났다. 그렇지만 일부 빼고는 고교 동창은 40대 후반부에 만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느라 바쁘고 여유가 없어 만나지 못하다가 40후반부에야 동창모임에 나갔다. 아마, 한국 남자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동창 모임은 역시나 학교 때의 추억을 많이 돌이켜 본다. 이제는 완전히 새로 지어진 건물이 들어선 모교에서 공부하던 40여 년 전의 우리 모습을 돌아보곤 한다. 주로 산악회에서 자주 모인다. 코트라 친구들과는 그동안 같이 걸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내가 나오기도 일찍 나왔지만 3년마다 국내와 해외 근무를 번갈아 하는 탓에 누가 한국에 있는 지도 모르게 30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써 그들이 정년퇴직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퇴직하면서 같이 모여 놀자는 의미로 ‘걷기 모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비록 퇴사한 지 오래되었지만, 이 친구들이 꾸준히 부른 탓에 인연이 끊이지 않았고 많은 추억을 같이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냥 만나기만 한 게 아니라 내가 무역을 하니까 해외 바이어도 소개시켜주려고 하고, 뭔가 도움이 되려고 늘 마음써준 친구들이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20년이 넘도록 술까지 사주면 위로해준 친구들이다. 


1. 과거를 같이 한다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에 가까워지는 나이이다. 그동안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경륜이 쌓이기는 했지만, 사려(思慮)와 판단(判斷)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커녕 공자처럼 나이 쉰에 하늘의 뜻을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은 정신없이 바뀌었지만 이루어 놓은 것이 많지는 않다. 그러니 열심히 살았지만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동갑내기 친구들과 걷다보면 이런 공감대를 나누면서 지나간 인생을 돌보는 시간이 많다. 한 걸음 한 걸움에는 과거의 즐거웠던 일, 힘든 일들에 대한 추억의 공감이 있다. 그리고 집에서 아내나 직장에서 선후배에게 하지 못할 이야기도 웃어가며 들어줄 수 있는 동지의식이 있다. 이런 감정적 교류는 그 자체로 모임의 행복을 높여준다. 친구가 많은 사람이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니컬러스 크스 태키스가 지은 ‘행복은 전염된다’에 의하면 친구가 많을수록 행복해질 확률이 더 높아진다고 한다. 친구가 많아서 행복한 것인지, 행복하기 때문에 친구가 많아지는 것인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과도 같다. 대답은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친구가 행복을 만들어낸 다는 점이다. 더욱 신나는 것은 친구 중의 한 사람이 행복해지만 나도 행복해질 확률이 45%증가한다고 한다. 물론 이런 행복은 시간이 지나가면 그 효과가 낮아지는데, 우리가 친구로 인해 얻게 된 행복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행복이 사라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각각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친구들이 행복해진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기적으로 자극을 주어 우리의 행복 수준을 자연적인 수준보다 더 높이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같이 걷기는 서로의 행복을 나누기 좋은 수단이다. 달리기는 대화하기 숨이 차고, 자전거는 같이 라이딩하지만 대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걷는 것은 걷는 동안 풍경을 즐기면서, 대화 상대를 바꾸어 가면서 오랜 시간동안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다.  


2. 현재를 같이 한다

코트라 친구들은 직장에서 만났기 때문에 아무래도 직장에 관한 대화를 많이 한다. 그러다 문득 누가 ‘야 공장이야기 이제 그만하자, 지겹다’라고 하면 그럼 친구들은 ‘그래 맞아!’하고는 다시 공장 이야기로 돌아간다. 반면에 동창들은 지금 자신들의 삶이 주된 화젯거리다. 서로의 직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들 인생의 전환기에 다가서고 있다. 정년퇴직을 이제 막 했거나 할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는 친구들도 코로나로 바뀌는 삶의 환경에 새롭게 전략을 짜야할 시기이다. 사는 게 늘 그렇지만 요즘이야말로 누구나 위기이자 기회이자 결정적인 기로에 서있다. 사회의 생태계는 물론 인간관계로 ‘비대면’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구조로 새로이 형성되고 있다. 당장 변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변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이제까지의 삶보다 미래가 더 불안하다. 걸으면서 우리는 이런 불안과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정보 교환도 한다. 아무래도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서 개인의 경험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과 어려움만 같이 나누는 것은 아니다. 즐거움도 나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지나간 시간을 즐기지 못했음을 다시 반복하지 말자는 생각들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열심히 살기 보다는 적당히 살고 적당히 놀자 주의가 친구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 카르페디엠!  현실에 충실하자! 지금 즐기지 못하면 더 나이 먹어서는 놀지도 못한다. 밤새 술 마시고 놀다가도 다음 날 아침에 아무 일없다는 듯이 사무실에 출근했었건만, 이제는 다리를 힘껏 치켜 올려 힘차게 걸으려 애쓰지만 땅바닥이 발바닥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함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 미래를 같이 한다

세상은 사람이 전부다. 일도, 사랑도, 돈도 모두 사람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 갑자기 불꽃이 튀는 일은 20대 때나 가능하다. 30대 이후에는 사랑도, 일도 모두 검증된 사람하고만 일어난다. 그런데 그 검증의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시간을 통한 검증이다. 그 검증의 기간을 충분히 같이 지낸 동창이나 회사 동기이다. 때로는 새로 일을 벌이는 친구는 같이 일해 줄 사람을 친구들 중에서 찾기도 하고, 자신이 아는 기회를 동기나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한다. 그 나이에 어렵게 얻은 직장이나 사업거리, 투자할 종목에 대한 정보에 대한 검증도 모임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렇게 서로들의 일거리와 정보를 나누는 것을 보면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질 때마다 내가 살날도 많이 남지 않았다는 불안감도 같이 든다. 850여명이나 되는 고교 동창 중에 얼마나 많은 친구가 저 세상으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30명 입사한 입사동기 중에 벌써 3명이 딴 세상에 가있다. 어차피 갈 곳이기는 하지만 아득히 먼 날일 줄 알았는데 한해 두해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할 때도 바로 친구의 문상갈 때이다. 


친구들하고의 만남은 주기적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정해서 만난다. 그것도 주로 토요일 만남이다. 그나마도 아쉬운데 코로나 때문에 모두 취소되거나 걷는 거리를 대폭 줄여서 ‘했다’라는 의미만 갖는다. 그래도 우리가 같이 걷는 것은 그냥 길이 있기 때문만도 아니고, 건강을 위해서만도 아니다. 친구들 사이에 공유하는 수많은 추억들, 그리고 학교나 직장이라는 구체적인 형태가 있는 감정적 친근감이 우리를 같이 걷게 한다. 같이 길을 걸으면서 까마득하게 잊었던 추억이 나오기도 하고, 친구를 비추어 나를 돌아보게도 된다. 친구들과 같이 걷기는 삶의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고, 즐거움을 더하는 달콤함이 있다. 그 달콤한 친구와 걷기를 아주 오랫동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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