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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취객 May 01. 2020

일단 외쳐 야마스!

그리스 신화보다 우조와 수블라키

    쿰쿰하고 비릿한 우조가 하얗게 변해갈 때쯤, 수블라키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옆 자리 모르는 아저씨에게 수줍게 외친다. 야마스! 우조를 홀짝홀짝, 혹은 깔끔하게 원샷하고 주변을 둘러보면 현지인들이 껄껄 웃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여름날 지중해 바닷가보다 따듯하고 파아란 그리스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 내 이야기다.


    런던의 첫 반년은 지옥 같았다. 음식은 맛없었고 물가는 비쌌다. 사람들은 차가웠고 새 직장은 적응이 쉽지 않았다. 매일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외로움에 사무쳐서 동료들에게 ‘이놈의 런던 다음 달엔 떠날 테다’라고 떠들어댔다. 그랬던 런던 생활을 1년 반이나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직장의 그리스인 친구들 덕이 아니었나 싶다. 그중에서도 어리고 또 마음 여린 Yannis(영어로는 john, 이야니스로 발음되는데 많은 그리스인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덕에 꽤나 많이 웃으며 (그를 놀리는 맛에) 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 일 끝나고 한 잔 생각날 때 항상 뛰쳐나와 줬던 것도 그들이었다. 같이 일했던 그리스인 동료들은 모두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다. 참 따듯했다.


    그들에 대한 좋은 마음들이 한데 모여 유럽 생활이 1년이 되어갈 때쯤 드디어 그리스행 비행기를 끊었다. 그래, 유럽에 왔으면 서양 역사와 미술, 철학, 신화 등등 모든 것의 근원 그리스를 가봐야지. 그리스 친구들이 추천해 준 베스트 시즌은 9~10월 여름이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따듯한 때였다. 하지만 항상 비수기의 가성비와 관광객 적은 여행을 추구하는 나는 청개구리처럼 11월 첫째 주에 그리스에 도착했다. 여행의 신이 나를 보우하사, 2018년 여름의 유럽은 기록적 폭염으로 인해 10월 말까지도 뜨거웠다. 내가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투어나 크루즈들이 11월부터 운행을 멈춘 관계로 관광객도 적고 숙소 가격도 굉장히 쌌지만 여전히 수영장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따듯했다.

내내 나 혼자 수영장을 쓸 정도로 한산했던 11월의 산토리니

    그리스는 한 장의 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것들을 간직한 나라다. 그 어느 나라들보다 오래됐는데, 그 어느 곳보다 새롭다. 아테네의 수많은 유적지들을 걷다 보면 분명 많은 역사서와 신화 들에서 읽었을 법한 이야기와 예술 작품들인데 내 생에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진다. 산토리니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사진들 속에서 봐왔음에도 그 하얗고 파란 마을에 그저 내가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보지 못한 수 백개의 섬들, 마을들, 항구들에서도 또 다른 매력이 있겠지.


    서론이 길었지만 사실 그리스에서 내 눈이 제일 빛났을 때는 길거리를 배회하다 보이는 기로스(Gyros)와 수블라키(Souvlaki) 가게들을 볼 때였다. 기로스와 수블라키는 쉽게 말해 그리스식 케밥이다. 하지만! 배 불뚝 나온 그리스 아저씨들에게 케밥 하나 달라고 했다간 호오오온나기 십상이다. 그리스인들은 때로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독특한 자부심이 있어서(지중해인들의 공통적인 성향 같다), 본인들이 부르는 이름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부르면 꽤나 기분 상해한다. 특히 그리스의 음식과 터키 음식 사이에 자주 그러는 듯하다. 그러면 나는 길가의 기로스 가게에 들어가서, ‘미아 기로스 파라칼로!(mia gyros parakalo!- 기로스 하나 주세요!)’를 외친다. 피타 빵 사이에 꼬치에 크게 구운 고기를 칼로 썰어 낸 것과 감자튀김 듬뿍, 짜지키 소스 더 듬뿍이 들어간 기로스가 호쾌하게 나온다. 그럼 그때쯤, 또 외치는 거다. ‘미아 우조 파라칼로! – 우조 하나 주세요!’. 그럼 그때쯤 주인아저씨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날 쳐다본다. 이 아시안녀석, 음식 좀 먹을 줄 아는데?

기로스는 피타 브레드로 싸서 들고 다니며 먹게 주기도 하고, 접시에 넓게 펴서 나오기도 한다.


    우조는 그리스와 사이프러스의 전통주다. 향신료 아니스를 기반으로 만든 증류주로, 우리에게는 고흐의 술로 유명한 프랑스의 압생트나 이탈리아의 삼부카와 같은 계열의 술이다. 다른 두 가지 술과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른 우조는, 시큼 쿱쿱 비릿한 특유의 향이 있어서 꽤나 호불호가 갈릴 법하다. (사실 나는 그리스에서 우조보단 맥주를 더 즐겨 마셨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우조의 특이점은 우조에 물을 섞어 마시면 온다. 투명했던 우조가 갑자기 우유처럼 탁한 색깔로 바뀐다! 아니스 오일은 알코올에선 투명한 빛을 띠지만, 물과 섞이면서 유화 현상이 일어나 우조를 탁하게 만든다. 이 현상이 신기하여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면, 그리스의 밤은 구경조차 못하고 쓰러져 잠들어 버릴지 모른다. 우조가 탁해진 건지 내 간이 탁해진 건지. 관광객들이 잘 안 찾는 전통주다 보니, 외딴 거리 현지인들이 모여 있는 가게에서 우조 한 잔 시키면 내가 바로 한류스타.

물을 섞으면 탁해지는 우조, 우조를 마실 때면 거하게 취해버려 남은 사진조차 없다. (출처: www.greece10best.com)


    뜨거운 태양 아래, 매시간 다른 파란색을 자랑하는 바닷가를 걷다 보면 또 배도 출출하고 목도 탄다. 그러면 지중해 내음 발산하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음식들을 시킨다. 그리스의 각종 디핑 소스들, 올리브 오일 흥건한 그리스 샐러드, 올리브 오일 인심 충만해서 오일에 잠겨버린 그릴드 옥토퍼스, 그리고 또다시 수블라키(수블라키는 기로스와는 다르게 꼬치에 길게 구워 그 모양 그대로 내는 요리다. 케밥으로는 쉬쉬 케밥 같은). 음식이 가는데 술이 빠질 수 없는 법. 그리스 맥주 미토스(Mythos)나 알파(alfa) 하나 시켜 목을 축인다. 아아 야마스! (그리스 어로 건배)

기로스보단 좀 더 요리처럼 나오는 수블라키. 그리고 그리스 맥주 미토스.


    꿈 같이 따듯한 11월 첫째 주가 지나고 다시 런던. 일이 끝나고 또 동료들이 옹기종기 모인다. 국적 다양한 곳에서 모인 친구들이지만 우리가 건배할 땐, 짠이니 치얼스니 살루테니 그런 거 없다. 오로지 야마스!!


    물론 그리스에 가면 아테네의 유수한 문화재를 관람하고 그것들을 훔쳐간 영국 놈들에게 분노하고 또 산토리니에서 포카리스X트 광고 한번 찍는 것도 중요하다.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배는 고프고 땀을 흘려 목을 축여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이리저리 둘러보자. 한국에선 카페가, 영국에선 펍이, 그리스에선 기로스가 있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언제나 그곳에 있다. 그럼 또 한 잔 해야지. 야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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