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다 기억을 잃어도 괜찮아, 다시 반복하면 되지
유명한 미드들을 보고 있으면 기시감이 들게 하는 장면들이 있다. 내가 겪은 일도 아니고, 분명 난 아직 이 에피소드를 보지 않았는데 왜 이런 기시감이 드는 걸까? 그들이 항상 가는 술집, 항상 마시는 술들이 있어서다. 주로 친한 친구들, 동료들로 나오는 배우들은 항상 같은 술집에서 하소연이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낸다. 심지어 본인의 자리까지 지정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프렌즈가 그렇고, 하우 아이 멧 유어 마더가 그렇고, 또 많은 미드들이 그렇다.
나도 런던에서 일이 끝나면 매일매일 회사 앞 펍으로 향했다. 런던 중심보단 훨씬 저렴해서 나이 지긋한 백인 할아버지들이 인상을 쓰며 싸구려 신문을 펴고 하루죙일 앉아 있는 그런 펍. 또 저녁에는 어디서 들 그렇게 기어 나오는지 젊은이들, 부랑자들, 술 취한 알코올 중독자들로 가득가득해지는 그런 펍이었다. 물론 도보 가능 거리의 주변에 사는 나와 내 동료들도 매일 출근 도장 찍는 단골이었다. 호텔의 근무는 3교대 시프트제여서, 아침 일찍 출근해 낮에 일이 끝나면 낮부터 마시고, 오후에 출근해 10시에 일이 끝나면 펍이 11시 마감 주문을 받기 전에(런던의 펍은 12시 전이면 닫는 경우가 대다수다) 얼른 뛰어가서 한잔 걸치고 집으로 가곤 했다. 도중에 승진해서 야근 담당 지배인이 되었을 땐, 퇴근 후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하나 시켜 모닝 비어 한잔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우리가 다니는 펍은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아침 식사 주문을 받고, 아침 8시부터 주류 주문이 가능했다. 아침 7시에 일을 마치고 펍에 도착하면 7시 반, 우선 아침 식사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올 때쯤! 8시 땡 치면 바텐더에게 달려가 맥주 한 잔 주문하는 게 매일 아침의 루틴이었다. 바텐더는 우리 얼굴 다 알면서도, 7:59분에도 맥주를 내는 법이 없다. 꼭 8시여야 한다. 그 펍의 체인 브랜드 이름은(펍 자체의 이름은 따로 있다.) Wetherspoon이었는데, 맥주 한잔 생각날 때면 동료에게 ‘spoon?’이라고 보내면 끝이다. 또 그 장소에서 만나면 된다.
영국의 펍들은 간단하게는 두부류로 나뉠 수 있다. Tied house와 Free house. Tied house는 말 그대로 묶인 하우스, 조합 혹은 기업으로 한데 묶여 같은 종류의 술을 지정해서 파는 펍들이다. 반대로 Free house는 좀 더 자유롭게 본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다양한 맥주들을 입점할 수 있다. 당연히 Tied house는 주로 많은 종류의 유명 브랜드의 맥주들을 취급하고 대신 Free house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곳이 많다. 반대로 Free house는 자신들만의 색깔을 고수하며 색다른 맥주를 입점하곤 한다. 말로만 들어선 Free house가 역사가 깊은 경우가 많겠지만, 때론 Tied house 중에서도 자신들의 오래된 이름은 그대로 유지하고 체인 브랜드를 함께 쓰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항상 가던 Wetherspoon은 그 Tied house 체인 중에서도 저렴한 가격으로 런던에서는 꽤나 유명한 브랜드다. 하지만 같은 브랜드의 체인이라고 해서 모든 지점이 같은 가격으로 술을 파는 것이 아니다. 런던 중심부, 특히 관광지역을 갈수록 같은 브랜드의 지점이라도 맥주의 가격은 오르고 외곽이나 기피 지역으로 갈수록 맥주의 가격은 싸진다. 우리 동네의 Wetherspoon은 zone 2라는 중심부에 속하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최중심부의 다른 Wetherspoon보다 1.5배 정도 저렴한 가격으로 맥주를 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의 사랑방이었지만)
Tied house여서 맥주의 종류가 적게 한정되어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기는 런던. 유럽 경제의 중심(다른 유럽인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이자 알코올 중독자들의 중심. 체인점에도 우리가 한국에서 세계맥주 병맥주로나 볼 수 있던 다양한 맥주들이 모두 관리 잘된 생맥주로 주문이 가능하다. 물론 거기에 다양한 칵테일과 와인, 병맥주 등등도 함께. 실제로 과거 영국의 무역 강세로 유럽의 많은 술이 영국을 거쳐 해외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어서, 현재까지도 런던에서 못 구하는 술은 없다고 칭해질 정도다.
한 맥주를 처음에는 하나하나 시도해보고 같은 날에도 3~4개의 다른 종류의 술과 맥주들을 마셔보았다. 하지만 결국 만류귀종.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하나의 술로 계속되기 마련이다. 회사 동료들도 자신들의 취향이 확고해서 매번 시키는 술이 같았다. 유럽의 펍들에서는 주로 우리나라의 후불제와는 다르게 한잔마다 매번 바에서 주문과 결제를 해야 하는 방식이 많다. 서양인들은 더치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매번 바에 가서 각자 자신의 술을 주문하고 돌아오기가 귀찮아서 자주 같이 다니는 친구들의 경우 round로 계산하는 방법이 쉽다. 이번 첫 잔은(first round) 내가 결제할 테니 다음 라운드는 네가 결제해줘, 라는 식으로. 그렇게 각자의 라운드가 끝나갈 때쯤엔 다들 알딸딸 해진다. 그러면 더 마시고 싶은 사람이 가서 다른 친구들 것까지 사다 주곤 했다. 매번 시키는 술이 같으니 어떤 술을 마실 테냐고 물어볼 것도 없다. 머리숱 없는 조지는 ‘스텔라(Stella artois)’, 조지 여자친구 알리샤는 ‘기네스’, 막내 야니스는 매번 이상한 칵테일(아무거나 갖다 줘도 잘 마신다), 맥주 못 마시는 키아란은 사과 발포주 ‘사이더(cider). 이런 식이다. 나는 언제나 ‘홉 하우스 13(Hop house 13)’.
홉 하우스 13은 아일랜드의 맥주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기네스’ 맥주 회사에서 만든 라거 맥주로, 검은색의 기네스와는 다르게 한국의 일반 맥주와 같은 황금색이다. 2015년 처음 발표된 술로 치면 신상 같은 브랜드이지만, 아일랜드와 영국을 거쳐 전 세계에서 대히트를 친 마시기 편한 라거 맥주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따금 생맥주로 파는 술집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생산, 유통 그리고 가게에서의 관리법의 차이 때문인지 영국에서 먹는 맛보다는 조금 아쉬운 가게들이 많다. 관리가 잘 된 펍에서 마셨을 경우 상큼한 과일향, 특히 살구와 복숭아 향이 향기롭게 목구멍을 적셔준다. 런던에 놀러 오는 한국 친구들에게 매번 추천할 때마다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만족감을 불러일으켜주는 맥주다.
이렇게 우선 각자의 술을 사서 옹기종기 모이면, 테이블이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아니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알코올 전문가 런더너들은 아무런 영향이 없다. 되려 테이블이 비어 있어도 서서 마시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영국인들은 안주도 없이 맥주 파인트만 들고 서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른 유럽인들이 영국 사람들은 항상 밖에서 서서 마신다고 놀릴 정도로. 한 라운드 두 라운드 마시다 보면 기분도 좋고 알딸딸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앞서 말한 것처럼 펍들은 막차가 끊기기 전부터 닫는 경우가 대다수여서 밤늦게 이리저리 배회할 필욘 없다. 물론 걸어서 집에 가는 우리는 기웃기웃 편의점에서 술을 챙겨 집에 모여 또 한잔하는 거지.
아아 홉 하우스 파인트 한잔 때문에 다시 런던으로 가야 하나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