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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취객 May 04. 2020

내 생애 최고로 행복한 날을 찾아서

1990년산이 1990년생에게

    포르투갈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리스본,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에서의 주인공의 출생지이자 게임의 시작 무대였다. 숱한 모험가의 나라, 에그 타르트의 나라, ‘빵’이라는 단어의 나라 정도? 그래서 포르투갈 여행을 준비할 때 최우선 목적지는 역시 리스본이었다. 리스본에서 에그 타르트도 먹고, 바다도 보고, 그래 완벽한 계획이야. 그런데 3~4박을 전부 리스본에서 보내기엔 아까우니까 어디 보자, 네이X에서 추천하는 포르투갈 여행지 추천에 제일 먼저 나오는 건… 포르투라고?



    그렇게 런던에서 리스본보다 더 저렴하게 갈 수 있는 포르투를 리스본으로 가는 경유지로 택해 출발했다. 포르투에 대한 공부는 공항 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려서 첫 숙소에 가기까지. 지리적 설명이나 역사적 가치, 유명 관광지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읽었지만 여전히 모르겠을 때는 역시 일단 나가서 지역의 음식을 먹어본다. 포르투갈 전체적 특유의 고기고기한 식단은, 아마 포르투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기름지고, 그러면서도 감칠 나고, 런던에서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에서 쌓아온 음식에 대한 울분이 사르르 녹는다. 이제 정신을 좀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봤다.


    포르투는 관광지로 유명하여 많은 시민들이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래서 가이드 투어도 활성화되어있었다. 나는 주로 현지인 영어 일일 가이드 투어를 선호하는 편이어서 포르투에서도 참가했는데, 리스본보다 포르투야말로 진정한 포르투갈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친절한 가이드들 덕에 포르투의 매력에 한껏 빠져들었다.(나라 이름 포르투갈에도 포르투가 들어가 있지 않냐며!) 특히나 혹은 역시나 내 최고의 관심사는 술. 포르투에서 최고의 ‘Must Do’인 포트 와인 투어야 말로 포르투 여행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물론 아니다. 와이너리 외에도 볼 것, 먹을 것, 배울 것이 너무도 많지만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술)

포르투는 그 자체로 예쁘다.

    포트 와인 투어는 포르투를 가로질러 대서양으로 향하는 도루 강의 남쪽, 가이아 지방에서 이뤄진다. 포도주 자체의 산지는 동쪽으로 한참 더 떨어져 있는데, 그것을 숙성하기 좋은 것이 가이아 지방이라 강을 따라 옮겨와서 숙성 후에 다시 강을 따라 포르투를 통해 다른 국가들로 진출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와이너리들이 강 건너 바로 앞 가이아 지방에 모여 있고,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 한 번에 이곳저곳 구경하기 용이하다. 각 와이너리 별로 개인 투어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한 가이드의 소개로 지정 와이너리 2~3개를 구경하는 투어를 이용한다.


    도대체 포트 와인은 뭐가 다른 와인이길래 포트 와인일까? 포트 와인은 쉽게 보면 와인이 아닌 주정 강화 와인이다. 와인은 포도를 발효시켜 만든 발효주고, 그것을 증류하여 도수를 높이고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는 것이 증류주인 브랜디. 와인에 브랜디를 섞어 발효를 중지시키고 변질을 막으며 도수를 높인 와인이! 주정 강화 와인. 그중에 포르투갈의 특정 지역에서 만들어진 와인들이! 포트 와인이다. 테킬라, 코냑처럼 특정 지역에서 생산돼야만 그 이름을 받을 수 있다.

브랜디와 와인이 함께 잠들어 있는 가이아 지구, 포트 와인 와이너리들

    그래서 포트 와인은 일반 와인보다 좀 더 달고 도수가 높으며 농축되어 있다. 내가 마실 때는 ‘어 이거 걸쭉한데?’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진하고 강했다. 도수가 높지만 단 맛으로 인해 디저트나 식전주처럼 마시기 간편했고, 물론 나는 포르투 있는 내내 어딜 가나 다양한 포트 와인을 시도했다. 가격도 싼 편이어서(포르투갈 내에선 정말 저렴하다), 런던에 다시 돌아갔을 때도 포르투갈에 다녀오는 친구들에겐 항상 포트 와인을 부탁했다.


    그런데 포트 와인을 열정적으로 설명해주던 가이드의 말로는, 포르투갈에서는 조금 아재 이미지가 있는 술이었다고 한다. 요즘은 젊은이들도 칵테일 등으로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있지만, 도수가 세고 다른 음식과 매치해서 먹기 어려운 불편함에 나이 많은 어른들이나 좋아하는 술로 취급된다고 했다. 참X슬 빨간 맛처럼.


    화이트, 토니, 루비, 콜헤이타 등 종류별로 다른 빛을 띠는 포트 와인을 마셔보고 빛에 비춰보고 있는데, 가이드 친구의 설명이 귓가에 머문다. 포르투에는, 자식이 생기면 그 해당 연도에 생산된 빈티지 포트 와인을 사서 선물로 보관하는 전통이 있다. 가이드가 그랬으며, 가이드의 부모님도, 가이드의 조부모님도. 모든 가족이 그렇지는 않지만, 포트 와인을 그리고 포르투의 문화를 사랑하는 가족은 그렇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의 포트 와인은, 본인이 생각했을 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순간에 따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시간 그 장소에 함께 해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들어가고 싶었던 학교에 들어갔을 때, 또 어떤 사람은 본인의 결혼식에, 혹은 본인의 자식이 태어난 날에.


    가이드가 경험한 최고(最古이자最高)의 포트 와인은 자기가 성인이 되던 날 할아버지가 조용히 불러 지하실 먼지 쌓인 곳에서 가져오라고 했던, 할아버지의 빈티지 포트 와인이었다고 한다. 그곳에 함께 모인 사람들과 마시며 웃었던 맛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은 언제일까? 내가 나의 포트와인을 열어야 할 것을 알 때는 분명 올 것이다. 1990년 산 포트 와인은 그때 열리겠지. 그래서 혹 나에게 아이가 생긴다면(결혼과 출산과 육아가 너무도 어려운 이 시기에도), 나는 꼭 아이의 출생 연도 빈티지 포트 와인을 선물하고 싶다. 술을 선물하는 것이 아닌 단 한 번 올지도 모르는 진정으로 행복한 날을 판별할 줄 아는 능력을, 또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 와인을 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선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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