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방랑, 그 서막
세계일주를 본격적으로 행동으로 옮긴 것은 2015년 12월 홋카이도로 떠나는 편도 비행기였다. 하지만 세계일주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011년 말부터였던 것 같다. 논산 육군 훈련소에서 너무나도 느리게 가는 시간에 심심했던 나는, 미래 계획을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끄적거렸다. 학생회장이 하고 싶다, 교환학생을 가고 싶다, 이게 하고 싶다 저게 하고 싶다. 버킷리스트를 적어 나가다 보니 어느새 군대 전역 후 하고 싶은 것들 중에 가장 임팩트 있게 마음속에 남은 것이 세계일주였다.
2015년 초, 교환학생의 꿈이 그리고 세계일주의 꿈이 한 발자국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다. 학교의 많은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에 나는 2015년 1학기 교환학생에 선발되어 오사카 대학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오사카 대학에서 온갖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사고뭉치 유학생으로 신나게 놀다가, 문득 내 주변에 다른 교환학생들이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친구들과 같이 놀고 이야기하다 보니 그들이 가진 시야와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 또 그를 통해 내가 얼마나 배우고 있는지 깨달았다. 갑자기 군대에서 꿈꿔 왔던 꿈을 진짜 이룰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최대한 돌아다니며 내 시야를 넓히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다.
또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고 싶지 않았다. 12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을 보고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에 갔다가 대학을 졸업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과 똑같이 포토샵 처리된 취업 사진을 찍고 대기업에 혹은 중소기업에 들어가 일을 한다. 서른이 조금 넘어 결혼하고 그 후 아기를 낳아 가족을 이루며, 가족을 위해 산다. 불혹의 나이에 회사에 한 몸 바쳐 살고 있을 것이고 지천명의 나이에 말 안 듣는 자식이 커 나가는 것을 보며 은퇴를 준비할 것이다. 틀을 깨고 싶었다. 취업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다. 다르게 살고 싶었다.
여기까지가 주변인들에게 이야기하는 (혹은 포장하는) 내가 세계일주를 하게 된 계기.
사실은 조금 두려웠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단 한 번도 공부를 제대로 한 적도 없었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걸 하고 싶은 것인지도 잘 몰랐다. 다른 한국 대학생들도 모두 그런 느낌을 느꼈겠지만, 나는 더 두려웠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은 나에게 지원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학점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으며, 어떻게 겨우겨우 취업을 한다 해도 회사에 매일 출근하며 반복된 일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되려 평범하게 남들 사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렵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속으론 알고 있었다. 터닝 포인트가 필요했다.
또 운이 좋아 대기업에서 인턴을 해보면서, 그리고 친누나들 주변의 번듯한 대기업에 들어간 분들의 모습을 보다 보니, 왠지 모르게 다들 2~3년 차에 많이들 나가더라. (높은 확률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남들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 났고, 본인 스스로도 열심히 노력해서 들어간 그곳에서. 대기업의 방식에 지치거나, 혹은 자신만의 길을 향할 자신이 있어 나오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어떤 사람은 자신만의 사업을 하거나, 어떤 사람은 ‘사’ 자가 들어가는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남들이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왜 3년 만에, 서른 즈음에 나오게 되었을까?
그래서 내 스스로 핑계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누군가는 들어갔다 나오는 기업들이라면, 서른 살에 새로운 길을 시작해도 늦는 게 아니라면, 서른까지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돌아다녀 보자.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서른 살의 나는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으로 서른 살까지만, 즐겨보자. (물론 이때의 나는 내가 서른이 지나서도 떠돌고 앉아있었을 줄은 몰랐겠지.)
그래서 떠났다. 거창한 계획이나 방향은 없었다. 꿈과 현실도피, 두 가지가 절묘하게 겹쳐 그 학기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했다. 학교는 졸업도 하지 않은 채로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편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